文學,藝術/고전·고미술

[그림, 詩에 빠지다]옛사람이 촛불 켜고 밤에 노닌 까닭은-이백 춘야연도리원서

바람아님 2014. 2. 10. 23:15
봄날 밤 도리원 연회에서 지은 시문의 서(春夜宴桃李園序)
이백(李白)


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夫天地者, 萬物之逆旅)
시간은 긴 세월을 지나가는 나그네라(光陰者, 百代之過客)
부평초 같은 인생 꿈 같은데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리(而浮生若夢, 爲歡幾何)
옛사람이 촛불 켜고 밤에 노닌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음이로다(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하물며 따뜻한 봄날이 아련한 경치로 나를 부르고(況陽春, 召我以煙景)
천지가 나에게 아름다운 문장을 빌려주었음이랴(大塊假我以文章)
복숭아꽃 오얏꽃 핀 향기로운 뜰에 모여(會桃李之芳園)
천륜의 즐거운 일을 펴니(序天倫之樂事)
여러 아우들의 글 솜씨가 빼어나 모두 사련이거늘(群季俊秀, 皆爲惠連)
내가 읊은 시만이 강락에게 부끄러워서 되겠는가(吾人詠歌, 獨康樂)
그윽한 감상이 아직 끝나지 않고 격조 있는 담론이 점점 맑아지네(幽賞未已, 高談轉淸)
화려한 잔치를 벌여 꽃 사이에 앉고 새 모양 술잔을 주고받으며 달 아래 취하니(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아름다운 글이 없으면 어찌 고아한 심정을 드러낼 수 있으랴(不有佳作, 何伸雅懷)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금곡의 벌주 수에 따르리라(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
   
▲ 김두량·김덕하 ‘사계산수도’ 중 봄, 1744년, 비단에 연한 색, 8.4×184㎝, 국립중앙박물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이백(李白·701~762)이 봄 밤에 여러 형제들과 꽃 피는 정원에 모여 큰 잔치를 벌인

장면을 읊은 시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시(詩)와 부(賦)를 지으며 담소를 나누고 술을 마셨는데 이때 지은 시를 모아

책으로 엮으면서 이백이 서문을 지었다.


이백의 아름다운 시를, 천년 뒤 남리(南里) 김두량(金斗樑·1696~1763)과 그의 아들 김덕하(金德夏·1722~1772)가 ‘사계산수도

(四季山水圖)’의 한 부분으로 그렸다. 꽃밭에 집을 지었는지 집 사이에 꽃을 심었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꽃이 다투어 핀

봄 밤, 대각선으로 배치된 화려한 누각에 사람들이 모였다. 넓은 마당에는 술과 안주를 나르는 하인들이 분주하고 시에는 언급

되지 않는 두 마리 학까지 그려져 있다. 고고한 선비들이 지향하는 이상향임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하늘이 이백에게 시 쓰는 재주를 주었으니
   
‘사계산수도’는 봄과 여름을 한 폭에, 가을과 겨울을 다른 한 폭에 나누어서 두 폭으로 그렸는데, 이백의 시는 봄 풍경에 들어

있다. 봄·여름 풍경의 도입 부분에는 ‘춘하도리원호흥경(春夏桃李園豪興景) 시갑자춘정월길일(旹甲子春正月吉日) 일영헌서

(日寧軒書) 김두량도본(金斗樑圖本)’이라 써넣어 봄 풍경이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를 바탕으로 그렸음을 밝혀 주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봄밤(春夜)’이 ‘봄여름(春夏)’으로 바뀐 것이다. ‘봄여름 도리원의 멋진 풍경을, 갑자년인 1744년 봄 1월 좋은

날에 일영헌이 글씨를 쓰고 김두량이 밑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일영헌이 누군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김두량을 아낀 영조의

호(號)로 추정된다. 김두량은 그의 아버지와 아들, 조카와 외가 식구들이 대거 화원(畵員)으로 활약한 대표적인 화원가문 출신

이다. 영조는 김두량에게 ‘남리’라는 호를 하사할 정도로 특별하게 신임했다. 일영헌을 영조의 호로 추정하는 이유는, 두 번째 폭

‘가을과 겨울’ 풍경에 창경궁의 ‘연경당(延慶堂)’에서 그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 때문이지만 영조와 김두량의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계산수도’는 그 구성이 독특하다. 많은 작가들이 ‘사계산수도’를 그릴 때 네 계절을 한 폭씩 독립되게 그리는 것을 선호한다.

각 계절의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에서처럼 네 계절을 여덟 장면으로 그릴 때도 각각의 그림은 한 폭씩 개별적이다. 안견(安堅·조선 초

기)을 비롯하여 이흥효(李興孝·1537~1593), 정선(鄭敾·1676∼1759), 김유성(金有聲·1725∼?), 정수영(鄭遂榮·1743∼1831)

등 많은 작가들이 시대를 불문하고 이런 형식으로 그렸다. 그런데 김두량은 각 폭으로 그리는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굳이 붓질이 까다로운 두루마리 형식을 선호했을까?
      
   소소한 일상 속에 담담한 운치
   
   계절과 계절이 만나는 지점은 칼로 자르듯이 명확하지 않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된다 해서 어제까지만 봄이고 오늘부터

갑자기 여름이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봄은 여름의 시작에 걸쳐 있고, 여름은 봄의 끝자락과 뒤섞여 있다.

계절의 자리바꿈은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어 그 변화과정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김두량이 두루마리 형식을 빌려 봄과 여름을

직조해 놓은 이유는, 단절할 수 없는 계절의 연속성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화면 왼쪽에서 학을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가면

서서히 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김두량의 ‘사계산수도’를 직접 보게 되면 우선 그 크기의 기이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봄·여름을 그린 그림은 가로 길이가

184㎝임에 반해 세로 길이는 8.4㎝다. 8.4㎝는 우리가 요즘 들고 다니는 명함의 가로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무척 짧다.

때문에 그림을 감상하려면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봐야 한다. 김두량은 왜 이렇게 좁은 화면을 고집했을까? 주문자의

요구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선택이었을까.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면이 작은 탓인지 쓱 보면 눈에 띄는 장면도 없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만이 담겨 있다. 장기 두고 담소하고 탁족하고 낚시하는 여름 장면은 물론 새참을 내가고 추수하고

타작하는 가을 장면 그리고 집안에서 대화하고 길쌈하고 들판에서 사냥하는 겨울 장면까지 모두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다. 너무도 평범하여 큰 화면에 드러내놓고 그리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흔한 일상이다. 사계의 시작은 이백의 화려한

시에서 출발한 김두량이 나머지 계절은 왜 평범함으로 채웠을까.
   
   도리원에서의 이백의 잔치도 평범하긴 마찬가지였다.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도, 기념할 만한 날도

아니었다. 이백이라는 천재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지어 그날의 정경을 기념하였기 때문에 불멸이 되었다.

김두량이 ‘사계산수도’에서 전하고 싶은 내용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진부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이라는 것을. 대상을 경이롭게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일상은 특별하다는 것을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