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4. 1. 27. 03:01
[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김일성과 박헌영 서열 바꾼 스탈린의 모스크바 면접
1900년생 박헌영은 1912년생 김일성보다 열두 살 위였다. 해방 이전 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세 차례에 걸쳐 10년 가까이 복역했다.....병보석으로 석방되어서는 만삭 아내 주세죽과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했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운영하던 공산주의 최고 간부 교육기관 국제레닌학교에서 공부했다. 수료 후에는 주세죽과 함께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1933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헌영은 국내로 압송돼 6년 형을 선고받았다....박헌영이 상하이에서 체포된 직후, 주세죽은 남편이 ‘평생 동지’로 의지했던 김단야와 함께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2개월 동안 탈출 여로에 김단야와 주세죽은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다. 훗날 소련공산당에 제출한 자술서에서 주세죽은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적었다. 1937년 주세죽은 모스크바에서 김단야의 아들 김비탈리이를 낳았다. 석 달 후 김단야는 ‘일본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소련 경찰에 체포돼 이듬해 사형당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의 호출을 받았다.....의전을 철저히 따졌던 스탈린은 상석인 자신의 오른쪽에 김일성, 그다음 자리인 왼쪽에 박헌영을 앉혔다......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조선의 소비에트화 정책을 조기에 실현하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했다.....해방 직후 박헌영, 김일성 순이었던 ‘공산당 서열’은 모스크바 비밀 회동 이후 공식적으로 역전되었다.
https://v.daum.net/v/20240127030118184
조선공산당 1인자 박헌영은 왜 ‘수령’이 되지 못했나
'生活文化 > 그때그일그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와대, 사람 살아선 안 되는 땅"…풍수연구가 최창조 교수 별세 (1) | 2024.02.01 |
---|---|
[신복룡의 신 영웅전] 라과디아 판사의 심금 울린 판결 (2) | 2024.02.01 |
1948년 7월 김구의 예측 “북한군 남침, 南은 망할 것” [유석재의 돌발史전] (1) | 2024.01.26 |
공지영 "이준석 예뻐보여, 한동훈 국힘이지만 맞는 말" 하태경 "용기있는 고백" (1) | 2024.01.24 |
정말, 이재명은 누구일까? [민경우의 운동권 이야기] (2) | 2024.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