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첩 보며 욕망 달래는 소복 입은 과부
왼쪽 여자의 입성에 비해, 오른쪽 여자는 확연히 다르다.
이 여자는 아래 위가 모두 흰옷이다. 저고리 깃도, 옷고름도, 곁마기 끝동도 모두 흰색이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짐작했겠지만, 이 여성은 상중에 있는 과부다. 아마도 남편이 죽었을 것이다.
부모, 시부모가 죽은 사람도 소복을 입기야 하지만, 그 경우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은 바로 과부일 뿐이다.
두 여자의 앞에 놓인 것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을 자세히 보면 예사 그림책이 아님을 알 것이다.
사람 둘이 엉켜 있다. 바로 남녀의 성관계를 그린 것이다. 그림은 여러 장으로 만들어져 있고, 한 페이지씩 넘겨보게 되어 있다.
이 그림은 환하게 그려져 있지만, 사실은 어두운 방안이다. 왜냐고? 그림책 앞의 촛불을 보라.
불꽃은 바람에 날려 오른쪽으로 드러눕다시피 하여 꺼질락 말락 하고 있다. 어두운 밤의 방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은밀히 두 여인이 한밤중에 춘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과부라 해서 성욕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과부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춘화첩을 보면서 달래고 있는
것이다. 과부의 억눌린 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문제는 춘화의 존재다.
인간의 성적 욕망 내부에는 포르노그래피를 향한 상상력이 존재한다.
성에 관해서는 그 어떤 치밀한 언어적 표현도 시각적 예술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고대건 중세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성적 상상력을 구체화한 조각과 회화가 존재한다.
오늘날 인터넷에 범람하는 포르노 사이트야말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그리고 한없이 복잡하고 한없이 다양한 성적 욕망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는 무량한 그 형상물이야말로 슬프게도 인간의 리얼리티일 것이다.
●인조 때 중국서 ‘성행위 조각품´ 들어와
그 포르노그래피의 한국에서의 원조가 바로 그림 속 두 여성이 보고 있는 춘화다.
춘화는 중국, 일본, 한국에 모두 있고, 또 서양의 경우는 더 풍부하게 남아 있다.
다만 한국의 춘화는 조선후기에 비로소 생산된 것이다. 박식하기로 이름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여러 글에서
춘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일부분을 읽어 보자.
일찍이 북경에서 온 그림책을 보았더니 그 속에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하는 여러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또 진흙상으로 만든 조각을 상자 속에 넣고 기계장치를 조작해 움직이게 한 것도 있었다.
이름을 춘화도라 했는데, 사람의 성욕을 돋우게 한다 하였다.
대개 북경에서 춘화도가 수입되었고, 때로는 조각품도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진흙으로 만든 조각품 중에는 인형을 상자 속에 넣고 기계장치를 해서 성행위 장면을 재현하도록 하는 신기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규경은 이어서 박양한(1677∼?)의 ‘매옹한록’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책에 의하면, 그런 그림은 춘화라 하고 그런
조각은 춘의(春意)라 한다 하였다.
이규경은 자신은 두견석으로 조각하고 자작나무 갑에 넣은 춘의 조각을 보았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고 한다.
‘매옹한록’의 기록은 계속된다. 중요한 것이니 직접 읽어 보자.
명나라 말기에 음란한 풍조가 날로 퍼져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모습을 혹은 조각으로 만들고 혹은 그림으로 그렸는데,
조각으로 만든 것은 춘의라 하였다.
사신이 와서 바친 예물 중에 상아로 만든 춘의 하나가 있었다.
인조가 승정원에 내렸는데, 상아로 남녀의 면목을 새긴 것으로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면 남녀관계의 동작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으로 모문룡이 우리를 모욕하려고 보낸 것이라 생각했고, 중국사람들이 평소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까마득히 몰랐다.
인조가 마침내 깨부수어 버리라고 명하였다.
이때 조정 신하들 중에 손에 쥐고 감상하는 자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 일을 비판해 그 사람의 청로(淸路)를 막아버렸다.
우리나라의 곧고 깨끗한 풍속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기록을 보면 인조 때 처음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조각품이 전해져 상당한 충격을 던졌던 것이다.
또 이 기록을 통해 인조 당시까지는 조선에 전혀 춘화나 춘의가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박양한은 춘의를 만지작거리며 감상한 사람의 벼슬길을 막아버린 것을 두고, 조선이 도덕적인 나라라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이런 향락적 문화는 풍요한 경제력 위에서 가능한 법이다.
박양한 자신이 명나라 말기부터 음풍이 번졌다고 하고 있거니와 사실이 그랬다.
중국에서는 춘화나 춘의가 한나라 이래로 지배층 사이에 유행하였다.
다만 그것이 민간의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진 것은 명대 말기에 와서이다.
명대 말기 상품경제의 발달로 도시문화가 꽃피자 자연히 소비와 향락열이 번졌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성적 욕망이 분출되었으니,
춘의와 춘화는 애당초 경제적 풍요 위에 꽃핀 성적 욕망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조차도 에도막부 이후 도시문화의 발달과 함께 춘화가 서민들에게 널리 유행했다.
화려한 채색 판화(우키요에,浮世繪)로 만든 춘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1719년 제술관으로 통신사행에 끼어 일본에 갔다 온 신유한(1681∼?)은 일본 여행기인 ‘해사동유록(海사東遊錄)’에서 일본의
남자는 품속에 반드시 운우도(雲雨圖)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성욕을 돕는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일본의 서점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키요에 춘화일 것이다.
●광통교 다리 위에 걸어놓고 팔던 춘화
이규경은 ‘화동기원변증설(華東妓源辨證說)’이란 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사이 춘화가 북경에서 들어와 널리 퍼졌다. 사대부들이 많이 돌려가며 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즉 춘화는 북경에 드나들 수 있는, 또 북경 현지에서 춘화를 구입할 수 있는 세력 있는 양반층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창업(1658∼1721)은 1712년 연행정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형 김창집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기행문 ‘연행일기’를 남긴다.
이 책의 12월23일 조에 춘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날 선비 차림의 한 사람이 그림을 팔러 오는데, 소년과 미인이 성관계를
하는 그림이었다. 서장관 노세하가 더 들추어 보려고 하자 김창업은 춘화 같다고 하면서 말린다.
김창업은 그 사람을 보고 선비냐고 묻고 그렇다고 답하자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어찌 춘화를 가져와 남에게 보이냐고
힐책하자 그 선비는 그림을 싸서 달아나고 만다.
이 일화에서 김창업이 정확하게 춘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김창업은 그야말로 혁혁한 서울의 명문가 안동김씨 집안 사람이다.
형 김창집이 영의정까지 지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런 명문가가 되어야 비로소 북경에서 춘화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비록 춘화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자신이 춘화를 보지 않았다면
과연 단박에 춘화라고 하는 판단이 나올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 하여 전해진 춘화는 드디어 조선에서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대부가에서 춘화를 가지는 것은 별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중반에 창작된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에서는 광통교 다리 위에서 걸어놓고
파는 그림을 잔뜩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춘화가 들어 있으며,‘춘향전’의 한 이본에도 춘향의
방 안을 묘사하면서 춘화를 꼽고 있다. 춘화를 감상하는 것은 18세기 이래 조선의 성풍속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