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나무
― 오규원(1941∼2007)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이렇게, 언뜻 눈과 새와 작은 돌들과 나무들을 그리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허공의 윤곽이다. ‘새와 나무’는 허공에 관한 정교하게 시각적인 시다. 새의, 작은 돌들의, 나무들의 그 허공은 공간의 허공일 뿐 아니라 시간의 허공이기도 하다. 어제와 오늘, 기억과 흔적, 부재와 현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하염없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허공의, 희고 부드러운 정적(靜寂)….
황인숙 시인
'文學,藝術 > 詩와 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사일언] '노들강변'에 흐르는 恨 (0) | 2014.08.15 |
---|---|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45>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0) | 2014.08.15 |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4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0) | 2014.08.13 |
[가슴으로 읽는 동시] 맨드라미 (0) | 2014.08.12 |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42>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0) | 2014.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