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①에서 계속)
매표소 정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율곡 선생 동상이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 사상가의 품격을 느끼게 한다. 과연 율곡 선생다운 교훈도 눈에 띈다. '견득사의(見得思義)'다. '이득을 보았으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온갖 비리에 오염된 사회에 점잖게, 그러나 엄하게 내리치는 '회초리' 같다.
이곳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넓은 화단이 조성돼 있는데 신사임당이 초충도에 소재로 그린 식물을 실제 심어놓은 '초충단'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는 말 그대로 식물과 곤충들이다. 여덟폭 병풍에 등장하는 참외, 수박, 가지, 맨드라미, 원추리, 양귀비, 여주, 봉숭아 화단이 조성돼 있다. 초충도에는 이들 식물과 함께 나비, 개구리, 풍뎅이 등 곤충과 동물들도 등장한다.
계단을 오르며 자경문(自警門)을 들어서면 깔끔하게 단장된 넓은 광장이 있고 저 멀리 정면에 율곡기념관이 마주 보인다. 광장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면 오죽헌과 문성사(文成祠)다. 이 오죽헌 건물은 안채와 구분해 별도의 담장을 쌓아 지은 별채다.
방 왼쪽으로는 두 칸을 하나로 튼 마루인데 율곡 선생이 6살때까지 학문을 배우던 곳이다.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그 기운을 전해 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마루에는 관광객을 위해 좋은 문구도 전시해 뒀다. '사람을 상대하는데는 마땅히 화평하고 공경하기에 힘써야 하며, 친구를 사귀는데는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고 하는 율곡 선생의 저서 '격몽요결'의 한 구절이다. 도탄에 빠져 '인성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이 건물은 꼭 관심있게 봐야 할 집이다. 조선 중종 때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으로,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 만큼 당연히 보물(제165호)로 지정됐다.
4면을 굵은 댓돌로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해 네모기둥을 세웠다.
입구 쪽에는 600년 넘은 목백일홍, 즉 배롱나무가 고목의 풍취를 자아내며 율곡 선생과 벗으로 지냈음을 증언하고 있다. 사임당은 어린 아들과 이 나무를 어루만지며 정원을 거닐었을 것이다. 그리고 속삭이듯 설명해줬을 것만 같다. 이 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새싹이 돋아 자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목백일홍과 옆의 노송인 율곡송, 그리고 율곡매(梅)는 오죽헌을 지켜온 나무들이다.
오죽헌 건물 뒤쪽 협문을 통해 들어서면 사랑채(바깥채)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안채가 있는 'ㅁ'자형 본채가 나온다. 바깥채는 폭이 좁은 건물인데 앞쪽으로 툇마루까지 설치해 아담한 정자 분위기를 연출한다. 앞쪽 기둥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라고 한다. 안채는 1996년 고증해 복원한 건물이지만 오죽헌과 사랑채는 율곡 선생 당시의 건물인 만큼 그 풍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겠다.
"산 첩첩 내 고향 여기서 천리 (千里家山萬疊峰)
꿈 속에도 오로지 고향생각 뿐 (歸心長在夢魂中)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孤輪月)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鏡浦臺前一陣風)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沙上白鷗恒聚散)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 (海門漁艇任西東)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 가 (何時重踏臨瀛路)
비단옷 입고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 할꼬 (更着斑衣膝下縫)"
홀로 사는 어머니와 떨어져 있을 때 지은 시로 신사임당의 마음을 엿보기에 충분할 것 같다.
사랑채 화단을 지나 산비탈 쪽 협문을 나가면 작고 예쁘게 생긴 건물, 어제각(御製閣)이다. 1788년 정조임금은 오죽헌에 율곡 선생의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관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궐로 가져오게 해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격몽요결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내려 보냈는데 이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어제각이다. 벼루는 율곡 선생이 어릴 때 쓰던 것으로 매우 작으며 예쁘게 생겼다.
▲어제각.다시 사랑채 앞에서 앞쪽 문을 통해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율곡기념관이 있다. 율곡의 저서와 신사임당의 유작을 비롯하여 가족인 매창ㆍ옥산 이우 등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또 광장에서 입지문(立志門)으로 내려가면 향토민속관과 강릉시립박물관이 있어 강릉에 전래되어 온 민속품들을 볼 수 있다. 정원에는 신사임당의 동상이 있다.
고맙게도 여행은 늘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누군가가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혹시 가졌을지도 모를 오만과 편견을 깨끗이 지운 채, 백지 위에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점만을 순수하게 그리고 돌아오게 한다.
이 오죽헌 역시 집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봤다는 그것 보다, 이 터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몇 백년 후손들에게까지 길이 본받을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느낌표 하나를 받아서 올 수 있다면 이 여행은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을까.(끝)
글ㆍ사진=남민 기자/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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