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시론] '판도라의 상자' 열린 英國

바람아님 2014. 9. 22. 09:06

(출처-조선일보 2014.09.22  전혜원 국립외교원 교수·유럽정치)

영국이 정체성의 위기에 처했다. 
지난 18일 치러진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주민투표에 이어 
현 집권당인 보수당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2017년경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영국인들은 영국이 무엇인지 
자문하고 있다.

문제는 정체성의 위기가 영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번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악화된 
정치의 위기가 민족국가와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이 긴축 정책을 펼치면서 복지 예산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로 인한 불만과 불안을 지방정부가 중앙정치로부터의 소외감과 연계시키면서 유럽의 분리주의 운동이 부상한 것이다. 
'중앙정치인=기득권층'의 구도를 제시하면서 기존 주류 정당 전반에 대한 불만 표출의 
장(場)을 마련한 것도 분리주의자들이 지지를 얻는 방편이 되었다. 
금융 위기 이후 부상한 극우·극좌 정당, 반(反)EU 정당들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반대 55%, 찬성 45%'로 스코틀랜드 독립이 부결됨에 따라 일단 영국의 국가적 단일성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변화는 이제부터다. 
주민투표 이틀 전에 보수당·자민당·노동당 당수들은 합동으로 독립안 부결 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재정 권한 확대 등 자치권 확대를 약속했다. 
이제 그 약속 이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간 영국 인구의 86%를 차지하는 
잉글랜드는 웨일스·북아일랜드·스코틀랜드와 달리 자치정부를 따로 갖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확대 시도는 타 지역, 특히 잉글랜드의 지역 간 형평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연방제 도입까지 언급되면서 영국 헌정 질서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부결에도 유럽의 분리주의 운동은 이번 투표를 계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 등에서 자치권 확대부터 분리 독립에 
이르기까지 수준과 강도 차이는 있지만 탈(脫)중앙화 요구는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같이 헌법상 모든 국민을 포함하지 않는 주민투표를 허용하지 않고 
국가의 영토적 단일성을 명시하고 있는 경우 합법적 주민투표 실시가 불문(不文) 헌법 
국가인 영국만큼 쉽지 않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논란분리주의자와 통합주의자 모두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대처했다는 데 그 의미를 갖는다.

유럽을 넘어 경기 침체로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국가들에도 이번 스코틀랜드 투표는 
교훈을 준다. 정치에 대한 소외감, 민족주의, 근거 없는 장밋빛 청사진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분리주의 운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 후 예상되는 
경제적 손실과 같은 냉정한 수치만은 아니었다. 
고든 브라운 전 총리는 정치·경제·사회적 이해득실과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등 
이성과 감성 코드를 함께 동원하는 연설로 막판에 독립 반대표를 결집시켰다.

결국 영국 정체성의 위기 원인도 정치 리더십이었고 그 처방도 정치 리더십이었다. 
분리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공존과 공유의 정치이다. 
'이익'의 언어만으로는 정치적 리더십이 발휘될 수 없다. 
소수의 큰 목소리를 통해 침묵하는 다수의 마음을 읽는 것이 민주주의란 사실을 
이번 스코틀랜드의 주민투표가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