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중앙선데이2014-12-14일자]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해인사에는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과 기도객이 몰렸다고 한다.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다. 멀리서 해인사 탐방에 나선 아저씨·아주머니 일행이 비구니 암자를 둘러보다가 여덟 살쯤 된 어리고 귀여운 사미니를 만나게 됐다. 어여쁜 아이가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합장을 하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던지 아주머니 한 분이 물었다.
“아이고, 이 어린것이… 얘야, 너 왜 이렇게 절에 와서 사니?”
어린 소녀, 즉 사미니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작은 입으로 야무지게 답했다.
“예~ 세상이 너무 무상(無常)해서요.”
“허, 참….”
어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야기를 전하는 지금도 그 애가 뭘 안다고 무상 타령을 했을까 싶다. 당시 얘기를 들은 관광객들도 철없는 어린애가 스님들 하는 얘기를 듣고 속없이 흉내 내는 줄 알고 어쩌면 더 가슴 아팠을 것이다. 12월이어서 그런지 이 얘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산과 들에 푸르고 무성했던 나무들이 단풍으로 물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차 하는 사이에 눈 내리는 겨울이니 말이다. 나 또한 세월의 무상함만큼이나 한 해 한 해 다르게 변해 가는 자신의 삶을 느낀다. “그래 맞아. 삶이든 자연이든 다 무상하고 허망한 게지.” 비도 안 오는데 중얼거림이 절로 나온다. 요즘엔 부고(訃告)도 많아 주위에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불교의 가르침이 기본적으로 무상과 무아(無我)를 말하고 있음을 재확인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계절을 통해서, 주위 사람들의 생로병사를 통해서, 그리고 권력과 부귀가 오래 못 가는 사회현실을 통해서 ‘무상하다’ ‘허망하다’는 깨우침을 얻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동시에 늘 잊고 싶어 하기도 하고, 또 늘 잊고야 만다. 어찌 생각하면, 어린 사미니가 무상하다고 말한 것은 어머니 같은 비구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냥 습관처럼 읊은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사물과 삶의 본질을 순수한 동심으로 읽어 낸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른에게는 없는, 영혼이 맑은 눈을 가졌기에 말이다.
무상하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뿐만 아니라 사실 판단에 기초한 냉철한 이성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생각이나 감정, 관계까지도 결국엔 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니까. 어쩌면 이것만이 불변의 진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진실은 힘이 세다. 따라서 진실에 기초한 삶이라야 불행을 견디고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추운 겨울, 서로 양보하고 배려할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인정스레 돕고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슬프도록 허망한 한시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원영 조계종에서 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아사리. 불교 계율을 현대사회와 접목시켜 삶에 변화를 꾀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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