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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맨살 눈부신 자작나무, 붉은 속살 신비로운 주목

바람아님 2015. 2. 2. 22:21
[중앙일보 2015-1-29 일자]

인제 자작나무숲, 태백산 주목 비교체험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에 눈이 내렸다. 나무가 하얗고 땅이 하얘서 온통 눈부시다.


겨울 나무를 보러 겨울 산에 들었다.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에 들었고, 태백산에 올라 주목 앞에 마주 섰다. 눈 쌓인 숲이어서, 해 돋는 산이어서 산행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야 비로소 한 해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① 자작나무는 하늘을 향해서만 자란다.
② 속은 다 썩어 텅 비었지만 꿋꿋이 서 있는 주목.

 

자작나무숲에 들다 원대리 자작나무숲

자작나무는 동토(冬土)의 나무다. 북위 45도 위 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하여 자작나무를 생각하면 북방의 이국적인 풍경이 먹물 번지듯이 떠오른다.

이를 테면 한도 끝도 없는 시베리아 벌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광활한 설원을 횡단열차가 부지런히 달린다. 자작나무숲 속 톨스토이의 무덤에 생각이 미치면, 영화 ‘닥터 지바고’의 개썰매 장면이 연상된다. 하나하나 저 먼 북방의 이야기이어서 자작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낯설다. 그래서 설렌다.

자작나무가 처음부터 우리와 상관없는 나무는 아니었다. 한반도가 오롯이 우리 땅이었던 시절, 이북의 정서는 북방의 정서와 다르지 않았다. 평안도 시인 백석(1912∼96)이 노래한 고향 풍경에서 잃어버렸던 정서가 읽힌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백화(白樺)’

그랬구나. 온통 자작나무였구나. 집도, 산도 죄 자작나무였구나. 자작나무는 온기였고, 물기였구나. 자작나무는, 자작나무 서있는 겨울 숲은 오래전 잃어버린 우리의 고향이다.

잊고 살았던 자작나무의 정서가 북위 38도 아래의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건 불과 서너 해 전의 일이다. 20∼30년 전 화전 일구던 산기슭에 조성했던 자작나무 군락지가 하나 둘 개방되면서부터다.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와 수산리, 강원도 태백시와 횡성군 일대에 자작나무를 심었고, 시간이 흘러 나무가 20m 높이까지 자랐다.

이 땅의 자작나무 군락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 원대리에 있다. 산림청이 1990년대 초반 자작나무 4만 그루를 심어 조성했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2월부터 석 달 넘게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워낙 사람이 몰리자 산불 조심기간에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하여 올해는 2월에도 문을 연다. 인제국유림관리소에 따르면 2011년 7850명에 불과했던 원대리 자작나무숲 탐방객이 지난해에는 약 11만5000명으로 14배나 늘었다. 요즘에도 주말 평균 1000명씩 몰려든다.

요즘처럼 눈 쌓인 겨울날 자작나무숲에 들면, 시야가 온통 하얘진다. 나무도 하얗고 땅도 하얗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순백의 세상은 이생의 풍경 너머의 것처럼 기이하다. 고요한 숲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뚝뚝 울린다. 하얀 수피(樹皮)를 쓰다듬는다. 이 흰 나무껍질에 편지를 쓰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했다.

눈밭에 누워 한참 하늘을 바라봤다. 아니, 자작나무를 바라봤다. 가지가 없어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③ 자작나무. 검은 생채기 같은 게 가지가 떨어져나간 자리다.

 

죽어서 더 아름다운 나무 태백산 주목


이 땅에는 수많은 생물이 산다. 때가 되면 죽고 다시 태어난다. 그게 우주의 섭리이고 자연의 이치다. 주목은 이 진리를 거스른다. 소나무·거북이 따위를 십장생(十長生)이라 하지만, 주목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 주목의 평균 수령은 500년이 넘는다.

하도 오래 살다 보니 주목은 갖은 풍상을 다 겪었다. 여러 흥망을 지켜봤고, 일제의 수탈을 경험했고, 민족 동란을 치렀다.

“예전에는 한반도에 주목이 정말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수많은 주목을 캐서 가져 갔다고 합니다.”

오장근(54) 식물생태학 박사이자 국립공원관리공단 보전정책부장의 설명이다. “오랜 주목이 살아남은 이유는 너무 산 깊숙이 있어서 운반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란다.

이 땅의 이름난 산마다 주목이 산다. 하나 주목 산이라면 역시 태백산(1567m)이다. 강원도 정선 두위봉에 수령 1400년이 넘는 주목이 살아있고, 소백산 자락에 주목 4000주가 모여 사는 군락지도 있지만 주목 하면 우리는 태백산을 먼저 떠올린다. 이유가 있다. 태백산 주목은 신비롭다. 영험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단군에게 제를 올리는 천제단이 있는 산이 태백산이다. 그 산에 어울리는 나무는 당연히 천 년 세월을 사는 주목이어야 한다.

태백산에는 3928그루의 주목이 산다. 주목이 산다고 썼으니, 고사목은 제외한 숫자다. 2009년 태백국유림관리소가 태백산 자락을 뒤져 일일이 센 숫자다. 고사목을 포함하면 4000주는 거뜬히 넘는다.

죽은 나무도 따지는 건 주목이 유일하다. 주목은 말 그대로 죽어서도 천 년을 살기 때문이다. 기둥이 다 썩어 이내 쓰러질 듯해도 주목은 종종 잎사귀를 틔운다. 나무의 99%가 말라도 뿌리 어딘가에 1%의 수분만 스미면 새 생명을 잉태한다. 죽은 듯하지만, 죽지 않은 것이다. 끝내 숨을 거둔 고사목이어도 다시 천 년을 버티고 서 있다. 오장근 박사의 설명이다.

“주목은 아주 천천히, 물기가 거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자라기 때문에 속살이 돌덩이처럼 단단합니다. 나무에 물기가 적다 보니 죽어서도 좀처럼 썩지 않습니다. 분명히 죽은 나무인데도 모진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이유이지요.”

일본인이 우리 주목을 탐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인은 돌덩이처럼 단단한 주목으로 바둑판을 만들었고, 불상을 빚었고, 고관대작의 가구를 만들었다. 줄기 속까지 붉어 붉은 나무, 즉 주목(朱木)이라 하는데 붉은 색이 악귀를 막아준다고 해서 집에도 많이 심었다.

태백산 주목은 모양이 제각각이다. 전나무처럼 꼿꼿한 나무도 있고, 반송처럼 축 늘어진 나무도 있다. 납작 엎드린 나무도 있고, 바람에 휘둘려 한쪽 방향으로 크게 기울어진 나무도 있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하나같이 신비롭다. 태백산 주목은 아름다운 순간이 따로 있다. 아침 해로 사위가 붉게 물들 무렵, 태백산 능선의 주목은 경외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 자작나무숲 산행정보=원대리 자작나무숲의 이름은 두 개다. 하나가 ‘자작나무 명품숲’, 다른 하나가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다. 25㏊(7만5000여 평) 면적의 자작나무 군락지가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고, 안내소부터 자작나무숲과 탐방로를 포함한 135㏊(약 40만 평) 일대가 자작나무 명품숲이다. 북부지방산림청 인제국유림 관리소에서 관리한다. 033-460-8031.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원래 1년에 2차례 산불 조심기간에 출입을 통제했다. 가을엔 11월1일부터 12월15일까지 1개월15일 동안, 봄에는 2월1일부터 5월15일까지 3개월15일 동안 문을 닫았다. 올해는 일단 2월 한 달은 개방한다. 3월 이후 개방 여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안내소 앞 주차장에서 1시간쯤 산길을 올라야 자작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3.2㎞ 길이의 임도로 경사가 완만해 걸을 만하다. 자작나무숲에 들면 모두 4개 코스의 탐방로가 나 있다. 900m 길이의 1코스와 1.5㎞ 길이의 2코스에 자작나무가 많다. 넉넉 잡아 4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 입장료·주차료 모두 없다.

● 태백산 주목 산행정보=태백산 산행 코스는 6개가 있다. 어느 코스를 선택하든 해발 1000m 지대까지 올라야 주목과 마주할 수 있다. 주목이 가장 많은 지역은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1567m) 근처다. 대부분이 고사목, 다시 말해 죽어서도 서 있는 주목이다. 장군봉∼천제단∼문수봉(1517m)으로 이어지는 3㎞ 길이의 능선 응달 곳곳에 주목 군락지가 있다. 군락지의 주목은 살아있는 주목이다.

유일사 매표소에서 출발하는 코스가 가장 짧다. 편도 4㎞인데 경사가 심하지 않아 두 시간이면 장군봉에 다다를 수 있다. 다만, 겨울에는 하루 등산객이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사람이 많다. 장군봉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면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태백산은 눈이 많이 쌓이는 산이다. 등산로 초입부터 눈이 얼어 있어 아이젠은 필수다. 장군봉 인근은 사방이 트여있어 바람이 거세다. 사진을 찍기는커녕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다. 단단히 옷을 챙겨 입어야 한다. 입장료 어른 2000원. 태백산 도립공원 사무소 033-550-2741.

글=손민호·이석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