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2.05 정선=최보윤 기자)
강원도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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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라지의 초승달 다리. 양쪽 마을 남녀가 매일 만나다 강물이 불어 만나지
- 못하는 애틋한 정이 ‘정선아리랑’에 녹아있다. /정선=최보윤 기자
정선은 가락이다. "정선같이 살기 좋은 곳 놀러 한 번 오세요"라는 정선아리랑의 흥(興)이 계속 귓가를 맴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정선의 아우라지는 남녀 사랑의 상징이다.
구절리에서 흐르는 송천과 임계면에서 흐르는 골지천이 만나는 곳이다.
한쪽은 물살이 세고, 다른 편은 고요해 남녀의 정기를 담았다는 뜻도 된다고 한다.
사실 정선 아리랑은 우국충정이 담긴 노래다.
고려 멸망 이후 조선의 역성혁명을 반대한 고려 유신 7명이 정선으로 은신처를 옮겨 평생 산나물만 뜯어먹고 살았다.
군(君)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애잔함을 한시로 표현했고,
이것이 현재의 정선아리랑(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의 기원이 됐다.
정선은 현재 진행형이다. 정선아리랑이 그려내는 건 인생 그 자체다.
남녀의 사랑에서 헤어짐, 죽음까지 구성진 음률에 맞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5500여 수.
해발 600m 높이에 설치된 정선의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한반도 지형을 그대로 닮았더니,
정선아리랑도 우리의 정서를 오롯이 담고 있다.-
- 정선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본 한반도 지형./정선=최보윤 기자
정선아리랑의 진수를 맛본 건 숙소에서였다. 정선군 여량면에 있는 옥산장. 옥산장의 '얼굴'이자 주인장 전옥매 여사의 기름지면서도 낭창낭창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진다.
정선문화원을 찾아가 정선아리랑을 오랜 시간 배웠다는 전옥매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당신은 나를 알기를 흑싸리 껍질로 알아도 나는 당신을 알기를 공산명월로 알지요"
외로움과 고달픔이 가사로 승화됐다는데 중간 중간 넘치는 해학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먼산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이놈의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 뚫는다"….
안 그래도 고된 시집살이, 민며느리로 들어간 아낙의 마음은 꺼져 식어버린 아궁이처럼 재 덩이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을 안고 뱅글뱅글 도는데, 우리 집에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을 왜 모르나."
밖에서 '계집질'을 하는 건지,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든 임은 올 생각을 안 한다.
전옥매 할머니의 설명이 곁들어지니 당시 부엌 구석에서 다 식은 찬밥에 얼음물 말아 꾸역꾸역 넘기며 울음 삼키던
여인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이라도 먹으면 다행.
님의 따뜻한 품 한번 느끼고 싶지만 찬 이불 속 한기(寒氣)는 불 지핀 아랫목에서도 더워질 생각을 안 한다.
한(恨)을 흥으로 만드는 정선의 힘이 놀랍기만 하다.
권인숙 문화해설사는
"정선(旌善)이라는 지명의 한자를 풀어보면 '착한(善) 사람(人)들이 모여 사는(生) 곳'이라고 볼 수 있다"며
"정선 특유의 단호한 말투 때문에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속 깊고 투명하긴 어느 지역 따를 데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만나는 사람들 얼굴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관광객이 늘어 주머니가 두둑해져 나오는 인심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깨끗한 자연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탁해져 버린 마음도 정화되는 게 아닐까 한다.
정선에 오면 레일바이크는 꼭 한 번씩 타보는 코스다.
아우라지에서 구절리를 잇는 7.2㎞의 철로 위를 달리는 일종의 자전거다.
2인용, 4인용이 있어 연인끼리 가족끼리 호흡 맞추기 좋다. 숲이며 계곡의 풍광이 눈부시다.
꽃피는 계절이면 그대로 그림일 듯하다.
"개구리란 놈이 뛰는 것은 멀리 가자는 것이요, 이내 몸이 웃는 것은 정들자는 뜻일세."
권인숙 문화해설사가 정선아리랑 한 수로 끝 인사를 대신한다.
착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니었다.
정이 푹 들어버렸다.
양금석의 정선아리랑 / "김영임의 정선아리랑" 동영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