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行·탐방·名畵/기행·여행.축제

사진가 허영한의 '사진 속으로 걷다가' ①

바람아님 2015. 2. 15. 09:39

헬스조선2015-2-13

 

세상의 모든 길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의 한가운데에 있다. 나의 시간과 그들의 시간은 각자의 지나온 시간과 지나갈 시간의 접점에서 만난다. 잠시 그곳에 함께 있게 된 그들과 나는 곧 다시 각자의 시간으로 건너가게 될 것이다. 시간의 접점은 길의 접점이기도 하다. 햇빛과 하늘과 나무와 바람은 길 위에 존재하는 것들이기도 하고, 길은 햇빛과 하늘과 나무와 바람을 총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길 위에는 각자의 시간과 동반자의 시간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함께 가고 있다. 길은 원래 길이었으나 사람이 있어서 또한 길이다. 마음을 함께 잡고 길을 걷는 두 사람의 한 풍경은 저 멀리 언덕 너머로 무한정 계속될 듯이 보였다. 그렇게 내 눈길은 그들의 길과 원래의 길 사이를 오가며 길 위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길을 나선 사람들만이 만날 수 있는 풍경과 타인의 세계는 서로 관계 없이 지나가는 별개의 세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길을 나설 때마다 만나는 모든 우연의 순간들이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다. 의심이라기보다는 고마운 순간들에 대한 놀라움이다. 세상에 가득한 우연의 시간들이 사실은 머나먼 과거에서 출발한 씨앗들이었고, 그들이 이 세상을 토양으로 발아하고 세월의 자양분으로 자라고 드디어 피어나는 개화의 환호처럼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있다. 그들은 나와 관계없이, 엄밀하게 말하자면 누구와도 관계없는 혼자들이 각각의 시간을 견뎌왔을 것이다. 나 또한 개별적으로 견뎌야 하는 시간의 정점에 와 있다.

우연들이 만들어내는 총체적 순간들은 이런 개인 혹은 개별적 사물들이 한 시간 한 장소에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주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과 그런 것들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순간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순간에 존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사람들은 두 가지다. 우연의 의미를 아는 사람과 우연을 그저 우연으로 알 뿐인 사람들. 눈앞의 우연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도 세상과의 모든 교류를 우연으로 지속할 뿐이다. 세상의 절반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연과 인연은 한 얼굴의 다른 표정 같은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는 마음속의 일이기도 하고, 내가 사는 세상과 평생 만날 일 없는 외계 사이의 거리만큼 멀기도 하다. 놀랍지 않은가, 우연하게도 수많은 우주의 존재들이 마치 지금을 위해 당신 앞에 모여들었고 또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연은 인연의 다른 이름이고 필연의 뒷모습이다. 인연이란 보이지 않는 끈도 놀랍지만, 늘 일어나는 총체적 우연과 나의 관계는 더욱 놀랍다.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극적인 우연을 인식하고 그 인식으로 뭔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오고 길을 나서고 그곳에 있는 것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의미를 깨닫는 것처럼.

이런 완성된 우연의 순간에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사진 한 장 찍는 일이 사실은 세상 만물과 생명들과의 인연을 담는 것이다. 사진으로 뭔가 하겠다는 열정과는 좀 다른 것이다. 열정이란 오로지 자기의 의지로서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노력과 욕망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나 되고 싶어 하는 자아를 위한 실현의 방식이기 때문에 늘 어떤 것에 대한 의도적 관심의 촉수를 올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열정은 그런 면에서 자세로서 훌륭하지만, 열정적 성향만으로 우연에 대응할 수는 없다. 열정이 있어도 그것과 함께 우연의 모습으로 주어진 세상 앞에 반응할 수 있는 심성과 혜안을 지녀야 한다. 사람이 품고 살아가며 만들어진 오래 된 가치나 세상 만물을 대하는 자세와 더 깊은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상 만물의 경이로움을 알고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길 위에 서 있으면 우연의 얼굴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적어도 우연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우연은 그 얼굴을 달리 한다. 사진 한 장 찍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불과 2-3초 후,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내 눈 앞에 펼쳐질지를 예견해 낸다는 것은 사진에 있어서 절대적 시간을 알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우연인가. 우연은 늘 예상하지 않은 가운데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 모습들을 예측할 수 있거나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그것들은 전적으로 우연이라 말할 수 없다.

/허영한
조선일보에서 22년간 사진 기자로 활약했으며, 사진 잡지 VON 편집장을 지냈다. 2005년, 2011년 두 차례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헬스조선 여행힐링사업부는 3월22일부터 26일까지 제주에서 '허영한 사진작가와 함께 하는 제주 사진 기행'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사진작가 故 김영갑이 사랑했던 제주도를 허영한 작가와 함께 걸으며 사진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지난 2년간 호평 속에 진행되었던 헬스조선의 힐링 프로그램의 핵심 일정도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다. 자세한 내용은 헬스조선 홈페이지(http://tour.healthchosun.com)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