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칼럼 1329

[사진의 기억] 엄마의 꽃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앙SUNDAY 2024. 3. 16. 00:18 수정 2024. 3. 16. 02:01 석작. 한 세대 전만 해도 서민들 가정에서 흔히 쓰이던 물건인데 이제는 그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드물다. 나무로 만든 궤나 농이 발달하기 이전부터 생활용품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던 바구니 함이다. 고리라고 하면 좀 더 익숙할까. 주로 버드나무가지로 엮어서 버들고리란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몇 해 전 사진가 한상재는 노모가 홀로 지내시던 친정집에서 석작 하나를 발견했다. 당시 아흔을 넘긴 어머니는 병원 침대에 누워,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가끔씩 빈집에 들러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어머니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초조했다. 딸인 자신이 엄마의 물건을 챙기고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25년간..

[사진의 기억] 사라지는 것과 다가오는 것

중앙SUNDAY 2024. 3. 9. 00:06 닭을 팔러 시장에 갔다가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일까, 아니면 시장에서 닭 한 마리 사 오는 길일까? 사연은 알 수 없어도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난리를 쳐야 할 사나운 수탉이 아주머니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얌전한 것을 보면 이 아주머니는 닭의 급소를 아는 게 틀림없다. 물렁물렁한 장바구니를 용케 각 잡아 머리에 이고 성질 고약한 수탉 한 마리를 한 손으로 제압한 채 저 멀리 언덕 너머 마을까지 걸어가고 있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은 흔들림 없이 단단하다. 때마침 자동차 한 대가 건조한 봄날에 메마른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달구지 다니던 길이 신작로로 넓혀지면서 가로수가 몇 그루만 듬성듬성 살아남았다. 수백 년을 이어 온 우리의 전통적인 농경문화..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눈 덮인 설악산 소나무에서 배운 지혜

한국일보 2024. 3. 4. 04:31 강원도 지역 폭설 소식에 설악산을 찾았다. 눈에 갇힌 설악동의 좁은 길을 걸으니, 소나무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어떤 소나무는 눈이 잔뜩 쌓여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권금성에서 내려다본 소나무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흡사 괴물처럼 보였다. 올겨울 끝자락에 ‘습기를 머금은 눈’이 많이 내려서인지 눈의 무게 때문에 소나무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무거운 눈을 버텨내는 소나무들의 모습에선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겹쳐졌다. 결코 가볍지 않은 ‘왕관의 무게’를 견디는 자는 ‘눈의 무게’를 견디는 소나무처럼 꿋꿋하게 살아간다면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폭설에 덮인 설악산 소나무는 우리에게 겨울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강인함, 꿋꿋함, 승리..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생존 위해 비상하는 기러기 떼

한국일보 2024. 2. 26. 04:31 매서운 겨울바람이 잦아들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이 찾아오면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겨울을 우리나라에서 보낸 철새들이다. 수백만 마리의 가창오리를 비롯해 천연기념물인 두루미, 고니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기러기가 대표적인 철새다. 이들이 곧 떠난다는 소식에 마지막 모습을 보러 경기 양평군 두물머리 인근 늪지를 찾았다. 이른 새벽 도착한 늪에는 안개만 자욱할 뿐 철새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밝아오고 안개가 조금 걷히면서 기러기들이 떼를 지어 비행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두 주자의 구령에 맞춘 듯 울음소리와 함께 질서 정연하게 물 위로 내려앉았다. 기러기 떼 사이로 드문드문 날아오는 고니들의 비행도 무척이나 아름다..

달빛 아래 모습 드러낸 '고래 무덤'…섬뜩한 수중세계 담았다

전자신문 2024. 2. 24. 14:21 그린란드 근해에서 사냥꾼들의 희생양이 된 고래의 해골을 담아낸 사진이 올해의 수중 사진으로 선정됐다. 20일(현지시간)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그린란드 근해를 촬영한 스웨덴 출신의 사진작가 알렉스 도슨이 '올해의 수중세계 사진작가 2024'(Underwater Photographer of the Year 2024; 이하 'UPY2024')에 선정됐다. 'UPY'는 지난 1965년 '브라이튼 수중 영화제'가 개막과 함께 개최된 영국의 권위있는 수중 사진대회다. 광각, 접사, 난파선, 행동 등 13개 부문으로 나눠 우승자를 선정하며, 4개 부문은 영국인에게만 수여한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 수중 사진작가 500명 이상이 6000장 이상의 작품을 출품했으며, 올해..

[사진의 기억] 바다 건너 찾아오는 봄

중앙SUNDAY 2024. 2. 24. 00:06 수정 2024. 2. 24. 01:53 바람이 분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은 남쪽 바다를 건너오며 한결 순해진 바람 소리를 기억한다. 때가 이르렀음을 아는 나무는 조용히 제 속의 것들을 흔들어 깨운다. 말랑말랑해진 흙 속으로 힘차게 뿌리를 뻗어 서서히 물을 빨아올린다. 겨우내 참았던 오랜 목마름을 풀어줄 수액이 수관을 따라 실개천으로 흐른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동네 어귀에 마을의 수문장처럼 동구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나무의 나이가 몇 살인가에 따라 그 마을의 역사도 가늠되었으므로 수령 수백 년의 멋진 동구나무는 마을의 자부심이었다. 나무를 타고 놀던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무와 함께 나이를 먹어갔다. 또한 집에서 멀리 떠났다가 오래..

[사진의 기억] 들리나요, 어린 누이의 귓속말

중앙SUNDAY 2024. 2. 17. 00:04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어린 동생이 울며 투정을 부리자, 누이가 무어라 말하며 어깨를 토닥인다. 누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의 언어들을 얼마나 익혔을까 싶은 어린아이다. 그래도 누이는, 그 빈약한 언어 속에 동생을 달랠 수 있는 말 몇 마디를 품고 있었던가 보다. 엿들을 수 없는 누이의 말을, 사진이 들려준다. 사진과 한두 줄의 짧은 글이 함께하는 조병준의 아포리즘 사진 ‘길 위의 시(詩)’. “긴 산문으로도 끝내 다 쓸 수 없는 이야기를 한 줄의 시로 할 수 있듯이, 백 쪽의 글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한 컷의 사진이 설명해 낼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때로 사진과 시는 등가다.” 조병준은 ‘시인’이다. 그러나 그를 시인이라고만 하기엔 수식이 부족하다..

[사진의 기억] 집안으로 나비가 들어오면

중앙SUNDAY 2024. 1. 27. 00:06 빈 벽 앞에 꽃무늬 방석이 하나 오롯하다. 벽지가 밀리고 해진 흔적으로 등을 기대었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듯이, 가운데가 팬 방석도 앉았던 사람의 무게를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빈집을 찍은 사진가 인주리의 사진 시리즈 ‘어리비치다’의 한 장이다. 사진의 배경이 된 충청남도 당진의 집은 160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기와집으로, 인주리의 조상들이 대를 이으며 살아왔다. 인주리는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사람이고, 아버지는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은 이사를 했고, 가구와 물건들은 그대로인 채 더 이상 사람은 살지 않는 빈집이 됐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에 아직도 빛이 들어와서 머물다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