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왔다. 22년 만이다. 난 지금까지 산 인생의 앞부분 절반을 엄마랑 살았다. (어머니라고 해야 하지만 이 나이 되도록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그래서 평소 입에 붙은 말인 ‘엄마’라고 쓴다)이 말은 뒷부분 절반은 엄마랑 살지 않았다는 뜻이다.
서울 출신인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되도록 집에 붙어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을 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안 됐다. 나가 살 만한 돈이 없었다. 부모님이 사는 집에 딱 붙어 산 이유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독립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난 건 결혼하는 날이었다. 27년하고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날 결혼식장에 가느라 옛집을 나왔다. 그 후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내 집으로 갔다. (물론 전세로 들어간 집이지만)
엄마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동생들이 결혼해서 나처럼 집을 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10년 가량을 혼자 지내셨다. 점점 문제가 생겼다. 이상징후를 눈치챈 건 1년여 전이다. 엄마가 살던 아파트는 항상 정돈이 잘 돼 있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었다. 청소를 할 필요없이 깨끗했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부엌을 보고서다. 몇몇 식기가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데 물기가 없었다. 늘 그랬다. 냉장고 안에는 이런저런 음식재료와 과일 등이 꽉 들어차 있었다. 곰곰이 살폈다. 결론이 나왔다. 음식을 해 먹지 않는다.
“음식 안 해 드세요?”
“아니, 그저…”
말끝을 흐린다. 다시 물어본다.
“음식 해 먹은 흔적이 없는데요?”
“그게 말이야…”
다시 얼버무린다.
맞다. 음식을 안 해 먹는 게. 이럴 땐 추궁을 해야 한다. 좀 다그쳤다. (아들은 엄마에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돌아온 답변은 ”귀찮아서“다. 이해는 가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듯하다. 불을 다루기가 두려운 거다. 가스레인지를 켜지 않았다. 문제는 기억력이다. 자주 잊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어제오늘의 증상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 으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지 않았다. 이미 엄마를 모시고 수년 전부터 삼성의료원 치매클리닉에 다녔다. 치매환자라서 간 게 아니다. 예방 차원에서 다닌 것이다. 분기에 한 번씩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약도 처방받아 먹고 있다. 역시 예방을 위해서다.
의사는 이런 예비 환자를 너무 많이 접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예비 환자(더 나빠지면 진짜 환자가 된다)를 대한다. 경륜이 묻어난다. 엄마에게 내려진 진단은 ‘경증 기억 장애’. 사실 장애라는 표현이 맞나 의아했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건망증이든 기억 장애든 자주 잊어버린다는 건 맞기 때문이다. 이게 심해지면 치매가 될 수 있단다.
엄마가 가스레인지를 사용하지 않은 건 켜 놓고 끄는 걸 잊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때가 왔다. 엄마가 돌아올 때다. 내가 엄마의 집을 나간 지 22년 만에 엄마가 내가 사는 곳으로 들어왔다. 네 식구가 다섯 식구가 됐다. 노인을 모시고 사는 생활은 황당과 당혹의 연속이다. 그 이야기를 앞으로 풀어보려 한다. 노인문제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 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뒷날 나의 모습을 엄마에게서 먼저 보는 셈이다. 노년을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난 엄마의 노년을 관찰하려 한다. ‘22년 만의 동거 ’는 80이 다 된 노인의 이야기이자 앞으로 노인이 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앞으로 비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서울 출신인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되도록 집에 붙어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을 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안 됐다. 나가 살 만한 돈이 없었다. 부모님이 사는 집에 딱 붙어 산 이유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독립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난 건 결혼하는 날이었다. 27년하고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날 결혼식장에 가느라 옛집을 나왔다. 그 후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내 집으로 갔다. (물론 전세로 들어간 집이지만)
엄마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동생들이 결혼해서 나처럼 집을 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10년 가량을 혼자 지내셨다. 점점 문제가 생겼다. 이상징후를 눈치챈 건 1년여 전이다. 엄마가 살던 아파트는 항상 정돈이 잘 돼 있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었다. 청소를 할 필요없이 깨끗했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부엌을 보고서다. 몇몇 식기가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데 물기가 없었다. 늘 그랬다. 냉장고 안에는 이런저런 음식재료와 과일 등이 꽉 들어차 있었다. 곰곰이 살폈다. 결론이 나왔다. 음식을 해 먹지 않는다.
“음식 안 해 드세요?”
“아니, 그저…”
말끝을 흐린다. 다시 물어본다.
“음식 해 먹은 흔적이 없는데요?”
“그게 말이야…”
다시 얼버무린다.
맞다. 음식을 안 해 먹는 게. 이럴 땐 추궁을 해야 한다. 좀 다그쳤다. (아들은 엄마에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돌아온 답변은 ”귀찮아서“다. 이해는 가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듯하다. 불을 다루기가 두려운 거다. 가스레인지를 켜지 않았다. 문제는 기억력이다. 자주 잊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어제오늘의 증상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 으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지 않았다. 이미 엄마를 모시고 수년 전부터 삼성의료원 치매클리닉에 다녔다. 치매환자라서 간 게 아니다. 예방 차원에서 다닌 것이다. 분기에 한 번씩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약도 처방받아 먹고 있다. 역시 예방을 위해서다.
의사는 이런 예비 환자를 너무 많이 접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예비 환자(더 나빠지면 진짜 환자가 된다)를 대한다. 경륜이 묻어난다. 엄마에게 내려진 진단은 ‘경증 기억 장애’. 사실 장애라는 표현이 맞나 의아했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건망증이든 기억 장애든 자주 잊어버린다는 건 맞기 때문이다. 이게 심해지면 치매가 될 수 있단다.
엄마가 가스레인지를 사용하지 않은 건 켜 놓고 끄는 걸 잊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때가 왔다. 엄마가 돌아올 때다. 내가 엄마의 집을 나간 지 22년 만에 엄마가 내가 사는 곳으로 들어왔다. 네 식구가 다섯 식구가 됐다. 노인을 모시고 사는 생활은 황당과 당혹의 연속이다. 그 이야기를 앞으로 풀어보려 한다. 노인문제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 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뒷날 나의 모습을 엄마에게서 먼저 보는 셈이다. 노년을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난 엄마의 노년을 관찰하려 한다. ‘22년 만의 동거 ’는 80이 다 된 노인의 이야기이자 앞으로 노인이 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앞으로 비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