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慶運宮)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대 군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순검들도 수백 명이 틈틈이 벌려 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냈다. (중략)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 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輦, 가마)을 탔다."
1897년 10월 14일 독립신문에 실린 논설의 일부다. 이 글에서 황국은 대한제국, 대황제는 고종을 의미한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래 500여 년 동안 지속돼 온 조선은 이제 황국이 됐다. 주변의 강국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생존할 길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논설에 등장하는 경운궁은 어디일까. 바로 덕수궁이다. 궁의 명칭이 바뀐 시점은 1907년이다. 그해 일본은 고종이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인 순종에게 강제로 황위를 양위하도록 시켰다.
순종은 경운궁에서 즉위한 뒤 아버지가 덕을 누리며 장수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궁호를 덕수궁으로 고쳤다. 그리고 자신은 조선의 법궁인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덕수궁을 사랑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에서 지내던 고종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덕수궁을 새로운 터전으로 조성했다.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동안 덕수궁을 보수하도록 명했고, 1년 뒤에는 대한제국의 중심지로 삼았다.
고종은 각국의 영사관이 밀집해 있는 정동 덕수궁에서 일본의 압박을 막아내려 했다. 그리고 이곳에 멋진 건물을 지어 대한제국이 정체된 소국이 아님을 알리고자 했다.
지난 10월 13일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개관한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은 서울의 궁궐 전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서양식 건축물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건립을 계획해 10년간의 공사 끝에 1910년 완공됐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했으며,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이오니아 양식이 적용됐다. 육중한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3층 건물로, 정면의 윗부분에는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꽃이 조각됐다.
석조전은 본래 외국의 영사와 사신이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였다. 가장 낮은 지층에는 시종이 머물렀고, 1층에서 교류 활동이 이뤄졌다. 2층은 황제와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할당됐다.
석조전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면서 주인이 사라진 빈집이 됐다. 순종의 동생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하면 잠시 체류하는 숙소로 활용된 것이 고작이었다.
이후에는 주로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쓰였다.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이 개최되기도 했다. 지금도 석조전과 회랑으로 이어진 별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용도가 수차례 바뀌는 동안 석조전 내부는 심하게 훼손돼 원형을 잃었다. 이번에 단행된 대한제국 역사관으로의 변신은 석조전의 본래 모습을 찾아주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실내가 복원된 석조전에 들어서면 100여 년 전 대한제국이 외국의 사절에게 선보이고자 했던 기품과 위용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대한제국 역사관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탄생했다. 우선 과거에 찍은 사진과 시공을 맡은 '메이플'(Maple) 사의 카탈로그가 전해오는 방은 그대로 꾸몄다.
창덕궁과 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가구를 꺼내 와 배치했고, 영국의 앤티크 숍에서 1910년대에 생산된 제품을 구입해 들여왔다. 구매가 불가능한 부품과 재료는 최대한 비슷하게 복제했다.
자료를 구할 수 없는 방은 전시실로 만들었다. 고종과 순종, 명성황후, 영친왕 등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핵심 인물을 설명하고,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폐현(陛見) 절차 등을 소개했다. 또 고종의 퇴위와 장례식에 대한 전시물도 마련됐다.
대한제국 역사관은 해설사와 동행하는 가이드 투어에 참가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 대략 20개로 나뉜 방을 돌아보는 데 45분이 소요된다.
석조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합 장소이자 현관인 중앙 홀이다. 2층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는 중앙 홀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하다. 바닥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타일이 촘촘히 깔려 있고, 조명과 장식물도 고풍스럽다.
석조전 내부 감상은 중앙 홀을 중심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진행된다. 일단 중앙 홀 오른쪽에는 귀빈대기실이 위치한다. 이곳에서 손님은 황제와 만나기 전, 대한제국의 관리와 대화를 나누며 다과를 즐겼다고 한다.
건립 개요와 대한제국에 관한 방을 통과하면 백미인 접견실이 나타난다. 중앙 홀의 정면에 있는 접견실은 황제가 공무를 행하는 공간이자 제국의 위상을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접견실은 당연히 가장 넓고, 아름답게 장식됐다. 가구와 인테리어에는 오얏꽃을 새겨 넣어 외국인에게 대한제국의 심장부에 서 있음을 주지시켰다.
접견실과 중앙 홀의 왼편은 식당이다. 크기에 따라 소식당(小食堂)과 대식당(大食堂)으로 구분된다. 소식당에서는 대여섯 명 정도가 식사를 했고, 대식당에서는 최대 12명이 연회를 즐겼다.
대식당의 탁자 위에는 식기가 비치돼 있는데, 모두 서양식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외국인이 참석하는 만찬에 양식 코스 요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대식당의 한편에는 건물 구조를 엿볼 수 있도록 마감하지 않은 벽체가 노출돼 있다. 외부에는 하얀 화강암이 사용됐지만, 안쪽은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온수를 공급하는 파이프도 눈에 띈다.
석조전의 특징은 편전과 침전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정사를 펼치는 전각과 잠자리에 드는 건물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석조전에서는 그러한 구분을 층으로 했다. 황제가 일상을 영위하는 곳이었던 2층에는 침실과 거실이 있었다.
재현된 석조전에도 황제 침실과 황후 침실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두 침실이 정해진 용도로 이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고종은 덕수궁의 또 다른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에 주로 머물렀고, 황후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 침실에는 침대와 옷장, 작은 탁자, 세면대 등이 똑같이 설치돼 있는데, 황제 침실은 노란색, 황후 침실은 붉은색으로 차별화했다. 또 각각의 침실에는 사랑방과 규방 역할을 하는 서재와 거실이 딸려 있다.
덕수궁 내 석조전 주변 건물은 조선의 궁궐 건축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전인 중화전(中和殿)과 함녕전 주위에 예스러운 한옥이 오밀조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 건물들은 대부분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급하게 재건된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중화전과 중화문은 모두 2층이었으나 단층으로 변했고, 함녕전의 정문이었던 광명문(光明門)은 엉뚱한 곳에 홀로 놓였다.
박상현 기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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