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덕수궁 지도를 보면 지금보다 훨씬 넓다.
과거에는 석조전 뒤편의 담 너머로도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덕수초등학교와 옛 경기여고 터도 덕수궁 영역에 포함됐다.
궁의 면적이 축소되면서 많은 전각이 파괴되거나 섬처럼 외떨어졌다. 중명전(重明殿) 또한 마찬가지였다.
'광명이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뜻의 중명전은 명칭과는 정반대의 운명을 감당해야 했다. 러시아인이 황실 도서관으로 디자인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897년 개관했으나 1901년 불이 나 재건됐다.
덕수궁 화재 이후에는 고종의 처소가 되면서 갑작스레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당시는 대한제국이 풍전등화의 신세일 때였다. 결국 1905년 11월 18일 중명전을 침범한 일본은 고종을 겁박해 제국의 외교권을 넘겨받는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중명전에 기거하던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각국의 외교관과 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 세 명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탄원서를 제출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한일병합이 된 뒤 중명전은 외국인의 사교 모임인 '경성구락부'의 장소가 됐다. 그리고 1925년에는 재차 전소돼 다시 지어졌다. 해방 후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됐다가 민간에 매각됐고, 2010년 복원을 완료해 일반에 개방됐다.
중명전은 덕수궁 대한문을 빠져나와 고즈넉한 돌담이 이어진 정동길을 500m 정도 걸어야 닿는다. 표지판이 워낙 작아서 신경 쓰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정동극장 옆 좁은 골목길에 숨어 있는 중명전은 갈색 벽돌로 만든 단아한 2층 양옥이다. 정면과 측면에 아치가 있는 회랑이 설치돼 있고, 입구는 다소 돌출돼 있다. 입구의 2층은 자연스럽게 발코니로 설계됐다.
대한제국의 비운이 깃든 중명전 내부는 1층만 둘러볼 수 있다. 가운데 복도가 있고, 좌우의 방은 전시실이다.
가장 넓은 왼쪽 방은 주제가 '을사늑약'이다. 대한문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군의 사진, 을사늑약문, 늑약을 체결할 때의 오찬 자리 배치도 등이 전시돼 있다.
복도 건너편 방은 전시 공간이 세 개로 나뉜다. 첫 번째는 '중명전의 탄생'이다.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리던 건물이 중명전이 된 경위가 설명돼 있고, 100여 년 전 찍은 흑백사진도 걸려 있다.
다음 전시실로 넘어가면 고종과 중명전의 인연을 살펴볼 수 있다. 고종은 황제로서의 마지막 3년을 중명전에서 보냈다. 이곳에는 각국 신문이 보도한 을사늑약에 대한 기사도 있다.
중명전의 마지막 전시실은 헤이그 특사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특사를 파견하게 된 계기,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소상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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