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1.31 최홍렬 주말뉴스부 차장)
삼성전자 디자인 혁신 위해 스카우트된 이돈태 전무
"비행기부터 냄비·걸레까지… 근사한 것보다 고객 만족감 주는 게 우선"
상식을 깬 逆발상
英서 비행기 좌석 두 개를 한 세트로 마주보게 배치
앞뒤 공간 넓혀 180도로 누울 수 있어
名品, 작은 디테일서 승부
제품 디자인 90%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승패는 나머지 10%에 달려… 디테일은 沒入 통해 완성
英회사 입사7년만에 CEO로
입사 초 허드렛일 도맡아… 열심히 일하는 것밖에
차별화할 방법이 없어 몇 년간 휴가 안 갔다
좋은 디자인의 조건
움직이는 과녁을 정확하게 맞히는 것이지
활 시위 당기는 힘 자랑이 아니다
"나는 촌놈이다. 디자이너라고 하면 다들 꽁지 머리에 독특한 스타일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나 나올 법한 산골 출신이란 것을 숨기지 않는다."
혁신적이고 효율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이돈태(47)는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인터뷰는 지난해 그가 영국 디자인 컨설팅 회사 탠저린(tangerine) 공동대표로 일하던 시절 이뤄졌다.
당시 그는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최근 그는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글로벌디자인팀장(전무)으로 스카우트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인지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워했다.
- 이돈태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글로벌디자인팀장(전무)은 글로벌 시장에서
- 인정받는 한국의 산업 디자이너다. 영국의 세계적 디자인 회사인 탠저린
- 공동대표를 지낸 그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가장 불편해하는
-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 디자인으로 개선해주면서도 기업이 이윤을 낼 수 있게
-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 이태경 기자
그는 "TV·휴대전화·노트북·카메라·가전제품 등의 디자인 역량을 강화하고, 세계 각 지역 소비자들의 감성을 반영한
이 전무는 비행기·중장비 같은 중후장대 산업부터 냄비·걸레·의자 등 소비재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디자인을 해왔다.
디자인의 시대이다. 소비자들은 '멋있다' '예쁘다'는 느낌이 들면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산다.
'유럽 빅 5' 산업디자인회사 공동대표 올라
이 전무가 세계 디자인 업계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2000년 영국항공의 비즈니스클래스 좌석 디자인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국내에서는 래미안 아파트의 '한국형 욕실' 디자인이 유명하다.
그가 공동대표로 있었던 탠저린은 유럽 디자인 컨설팅 회사 중 '빅 5' 중 하나로 꼽힌다.
"탠저린에서 인턴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디자이너로 인정받기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 2000년 탠저린이 디자인한 영국항공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 사람은 하체보다
- 상체가 더 큰 것에 착안해 2개의 의자를 한 쌍으로 마주 보게 배치하고
- 앞뒤 공간을 넓혀 누울 수 있게 했다. / 탠저린 제공
그는 "한번 믿음이 쌓이면 계속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게 강원도식 사고인데,
그는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에 삼수 끝에 가까스로 입학했다.
―디자인 전공 유학생이 탠저린에서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좋았을 것 같다. 처음에 어떤 일을 했나.
"사람들이 꺼리는 모델링 같은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당시 탠저린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서른 넘어 유학 갔으니 영어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영국 디자인 회사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가 7년 만에 대표가 됐다. 비결이 뭔가.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 내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밤늦게까지 일했다.
1998년 탠저린에 인턴으로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정식 직원이 됐다.
탠저린이 유럽에서 손꼽히는 디자인회사로 성장하기까지 그의 공이 컸다. 특히 10여년 전 그의 주도로 서울에 아시아 총괄 지사를 설치한 것은 탠저린이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탠저린이 영국의 산업디자인업계에선 최초로 제조업이 강하고 성장 잠재력이 많은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서울에 진출했다. 당시 탠저린의 아시아 비중은 5%도 안 되었지만, 최근 7~8배로 껑충 뛰었다"고 말했다.
그가 참여한 프로젝트의 첫 히트 작품은 2000년에 시작한 영국항공 비즈니스클래스 좌석 디자인이었다.
―비행기나 버스 의자는 모두 앞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깬 역(逆)발상이다.
"승객들이 마주 보고 앉을 때 비행 방향과 반대쪽을 보고 앉는 승객이 불편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영국항공 측을 어떻게 납득시켰나.
"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앉는 것에 대한 우려는 영국의 전통 마차를 예로 들어 설득했다.
이 프로젝트는 '대박'을 터뜨렸다.
- 이돈태 삼성전자 전무가 탠저린에서 근무하던 시절 디자인에 참여한 해피콜의
- 냄비와 웨지우드 자기 제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비행기 좌석부터
- 냄비·걸레까지 가리지 않고 디자인한다. / 조선일보DB
이 전무가 한국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래미안의 '한국형 욕실'이다.
―아파트에 획일적인 욕실 구조를 한국 생활습관에 맞게 바꿨다던데.
"우리는 발을 자주 씻고, 걸레를 빨아 집안 청소를 한다. 기존 아파트에는 이에 대한 배려가 적었다.
―한국의 아파트는 획일적인 구조로 개성이 없다는 평이 많았다.
"건설사들이 수십년 동안 지은 아파트는 거실이나 주방을 넓히거나 방의 개수를 늘리고 줄이는 정도로만 변화를 주었다.
―한국의 디자인은 전반적으로 우수하지만 디테일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다.
"작은 디테일이 큰 차이를 만든다.
―걸레도 디자인했던데.
"비행기가 됐든 걸레가 됐든 내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근사한 것을 디자인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소비자의 마음을 읽나.
"굴삭기 디자인을 맡으면 중장비 운전을 배우기도 한다.
―어린 시절 그림을 잘 그린 게 디자인 작업에 도움이 됐을 것 같다.
"디자인은 그 자리에서 즉석에서 그려주는 길거리 초상화가 아니다. 그림이 아니라 생각이 중요하다.
―디자인이 소비자들과 발맞추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디자인은 디자이너를 위한 자아실현의 도구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좋은 디자인은 시장의 움직이는 과녁을 맞히는 것"
―디자이너는 소비자의 요구도 알아야 하지만 경영자도 설득해야 한다.
"디자인에서 가장 나쁜 것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다. '커피이론'이란 게 있다.
디자이너는 뜨거운 커피가 시장에 먹힌다고 생각해 뜨거운 커피를 개발했다.
하지만 일부 다른 사람은 차가운 커피를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양쪽 고객을 다 만족시키기 위해 미지근한 커피를 만들었는데, 실제 시장에서는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많은 사람이 참견해 이도 저도 아닌 디자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제품 생산 과정에서 당초 디자인이 변형되지 않도록 디자이너에게 실질적 권한을 주어야 한다."
―경영은 수치를 요구하고, 디자인은 비전을 제시한다.
접점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경영자들은 디자인을 아이스크림에 꽂혀 있는 막대 초콜릿처럼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디자인은 제품의 겉모양을 꾸미는 데 그치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소비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욕구를 읽어내고 시장의 흐름을 상품에 반영한다.
경영자는 디자이너의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기업의 수익으로 연결된다."
―구상을 하다 벽에 부딪히면 어떻게 하나.
"홍익대 인근이나 재래시장같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거나 오래 묵어
정겨운 삶의 현장에 들어가 푹 파묻힌다.
우리가 늘 접하는 사람들의 행태나 문화를 들여다보면 전에 없던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디자인은 과학인가, 예술인가.
"소비자의 욕구와 시장을 예측하기 위해 빅데이터 등을 동원하는 측면에선
과학이기도 하고, 소비자들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열망을 디자이너의
'촉(느낌)'으로 상상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시장은 달리는 목표물처럼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터에 근거한 예측보다 미래를 자유롭게 그려 보는
상상력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기업은 예측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지 못해 망한다'는 말도 있다."
―당신에게 디자인은 무엇인가.
"매번 새로운 산을 오르는 일이다. 디자인은 항상 제로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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