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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정조의 그림 정치 '화성능행도' … 8폭 병풍에 등장 인물만 7349명

바람아님 2015. 4. 2. 09:36

[중앙일보] 입력 2015.03.28 


죽향, 원추리, 견본채색, 24.9×25.5㎝,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컬처북스]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
윤철규 지음
컬처북스, 488쪽
4만3000원


다 핀 꽃, 봉오리만 밀고 올라와 있는 것, 꽃잎 사이의 붉은 점, 빛을 받은 잎사귀와 뒤집어진 것-. 원추리의 실제 모습을 사생한 듯한 이 그림은 19세기 중반 기생 죽향의 작품이다.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그림은 극히 드문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화첩 정도다. 이 원추리를 비롯해 연꽃·장미·난초 등 꽃 그림 13점이 들어 있다. 기록엔 평양 출신으로 묵죽화를 잘 그렸고, 시에도 뛰어났다 했다. 오세창(1864∼1953)의 『근역서화징』에 나오는 얘기다. 김정희(1786∼1856)의 『추사집』엔 죽향을 위해 읊은 시가 2수 수록돼 있다. 한 줌 기록과 한 권의 화첩으로 남은 죽향에 대해서도 이 책은 한 장(章)을 내줬다.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은 안견의 ‘몽유도원도’로 시작해 장승업(1843∼97)의 ‘기명절지도’로 마친다. 101명(작자 미상 15명 포함)의 119점을 종으로 횡으로 한 흐름 속에 엮었다. 조선 전기와 중기는 안견 화파와 중국의 영향 아래 시작된 절파 화풍을 소개했다. 조선 후기는 중국 남종화의 전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등장을 큰 줄기로 세워 설명했다. 감상용 화조화의 등장, 서민 의식을 반영한 길상화와 민화, 중국의 영향, 일본과의 간헐적 교류도 빼놓지 않았다. 감상용 그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간 덜 소개된 기록화도 다뤘다.

 대표적인 게 ‘화성능행도’다.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를 수원으로 모시고 가 환갑연을 베푼 행사를 8폭 병풍에 나눠 그린 대작이다. 화성에 도착한 뒤 베풀어진 행사에서 시작, 행사를 마치고 시흥대로를 행진해 노량진 배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장면까지 담았다. 매우 정치적인 행차였다. 부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조정 신하들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 행사를 무사히 마친 뒤 병풍을 제작해 ‘그림 정치’를 보여줬다. 병풍 전체의 등장 인물은 7349명, 조선시대 그림 중 가장 많은 인물이 그려졌다.

 이 대규모 궁중기록화는 자비대령 화원들의 작품이다. 정조가 만든 제도다. 예조 소속의 도화서가 아니라 국왕 직속 규장각에 소속시켜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화원으로 시험을 통해 따로 뽑았다. 시험 문제는 대개 유명한 시구를 하나 제시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라 했다. 덕분에 화원 화가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시 구절로 그림을 그리는 시의도(詩意圖)의 유행도 가져왔다. 책은 화가 개개인과 작품의 면면뿐 아니라 이처럼 미술과 정치, 당대 미술의 변화를 가져온 제도도 두루 살피고 있다.

 깔끔한 컬러 도판과 경어체의 조곤조곤한 설명, 옛 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할 만한 그림책이다. 저자는 중앙일보 미술 전문 기자로 일하다가 일본에 유학, 교토 붓쿄(佛校) 대학 석사, 도쿄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부회장을 지낸 뒤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로 있다.

권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