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도 자찬도 없이 한반도를 다시 읽다
임왜란~현대 500년 역사 동안 세계와 어떻게 맞섰는지 분석
"일본이 임진왜란 일으키면서 조선서 대륙·해양 세력 첫 충돌"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김시덕 지음|메디치|384쪽|1만6000원
젊은 학자의 공력(功力)이 대단하다.
김시덕(40)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는 최근 3년간 해마다 책을 냈다.
일본 고문헌과 문학·연극 작품 등에서 임진왜란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분석한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 '징비록'의 각종 판본을 검토하고 해설한 '교감·해설 징비록'(2013),
일본 옛 자료에 실린 삽화를 통해 7년 전쟁의 모습을 복원한 '그림이 된 임진왜란'(2014) 등이다.
우리 내부의 시선이 아니라 바깥에서 본 눈을 통해 16세기 벌어진 국제 전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힌 저작들이다.
2011년에는 일본에서 낸 책 '이국(異國) 정벌 전기의 세계'로 외국인으로는 처음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받았다.
한문·일본어·중국어·만주어 독해 능력으로 여러 문헌을 교차 검증하고 우리 역사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실증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김 교수는 "지금은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고려대 일문학과를 나와 일본의 고문헌 연구·교육기관인 국문학연구자료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2년 전부터 현직에 있다.
- /박상훈 기자
이번에 출간한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임진왜란부터 현대까지 거의 500년 역사를 다룬다.
긴 기간을 다루는 역사 연구는 자칫 허황한 거대 이론에 빠질 위험이 있지만 국내외 자료를 꼼꼼히 분석하고
구석구석 디테일을 살린 서술로 거대사와 미시사를 절묘하게 만나게 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박람강기(博覽强記)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서울대 연구실에서 지난 1일 만난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900여 차례 침략 피해만을 입은 평화의 나라라거나 반대로 방대한 강역(疆域)을 가진 제국이었다고 말하는
일부 주장이 있다"면서 "자학적이거나 환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와 맞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이번 책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첫 장부터 상식을 깬다. 흔히 한반도는 '지정학적 요충지'라고 하는데 16세기 해양 세력인 일본이 흥기하기 전까지는
유라시아 동부의 변방일 뿐이었다고 지적한다.
대륙 국가들은 한반도를 여러 차례 침략했지만 직접 지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21세기 현재는 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군사·통신 기술의 발달로 일본·중국·러시아 등이 굳이 한반도를 거쳐
상대국을 침공하거나 부동항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은 달라졌다고 말한다.
- 김 교수는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지로 떠오른 시점은
- 임진왜란이 처음이라고 했다. 사진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한 장면. /KBS 제공
김 교수는 "한반도 국가는 침략만 받은 게 아니라 바깥을 침공한 사례도 적지 않다"고 했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주변 민족이 숱하게 사라진 것은 물론 조선 전기에는 북쪽 여진인을 철저히 탄압했다.
훗날 여진 세계를 통일하는 청(후금) 태조 누르하치는 "인삼을 캐는 여진인을 조선 측이 죽이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조선 군대가 중국 북경에 진주한 적도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소현세자는 조선군을 이끌고 청나라 군대를 따라 명의 수도 북경에 진입했다.
소현세자를 모시던 신하가 쓴 '심양일기'는 이 전쟁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다.
김 교수는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파병한 것이 무의미한 게 아닌 것처럼 청의 강요에 따른 것이라도
한반도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에 진입한 것은 우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반 독자들이 불편해할 부분도 적지 않다.
'한반도 주민은 전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사람들로서 언제나 침략을 받아 왔고,
그 역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 한반도의 독립과 번영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국가는 일본이 아닌 중국' 같은 대목은
자칫 과거 일본의 침략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주장으로 읽힐 수도 있다.
김 교수는 "군인·기업인 대상으로 강연할 때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오해를 받더라도 복잡한 형태로 전달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