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의 1978년작 ‘엄버-블루(Umber-Blue)’. 나무가 쓰러져 흙이 되는 과정을 남다르게 받아들인 그는 “나와 내 그림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썼다. 그는 흙이 되었으나, 그림은 재조명되고 있다. [사진 PKM갤러리]
산에서 본 나무가 그리도 인상적이었을까. 63세의 윤형근(1928∼2007·사진)은 이렇게 썼다. 전시장 흰 벽에 걸린 그의 그림들은 나무기둥 같은 진갈색 혹은 흙빛이다. 엄버(umber:수산화철 계열의 갈색 안료)와 울트라마린(ultramarine·군청색)을 섞어 깊은 어둠을 표현했다. 윤형근은 테레빈유를 푼 안료를 귀얄붓에 담뿍 머금게 한 뒤 밑칠 안 된 캔버스에 무심히 내려그었다. 무엇을 닮게 그리고자 함도, 잘 그리려 애쓴 티도 안 나는 이 번진 그림은 보는 이의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는 듯하다.
윤형근전이 서울 삼청로 PKM갤러리에서 다음달 17일까지 열린다. 화가 작고 후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다. 화랑이 청와대 춘추관 앞에 이전 개관하며 마련한 전시다.
윤형근은 1928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났다. 45년 청주상업학교 졸업 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여기서 김환기(1913∼74)를 주임교수로 만났고, 후에 김 화백의 장녀와 결혼한다. 남들보다 늦은 30대 중반에 처음 개인전을 열었고, 40대 후반부터 자기 양식을 정착시켰다. 92년 영국 테이트 리버풀에서 연 ‘자연과 함께-한국 현대미술 속에 깃든 전통 정신’전에 박서보·정창섭·하종현·이강소 등과 참여했다. 미국의 대표적 미니멀리즘 작가 도날드 저드(1928∼94)와의 인연으로 93년 뉴욕 저드 재단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도 출품했다.
장인이 뉴욕서 세상을 뜬 70년대 중반부터 줄곧 흙빛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91년 개인전 도록에 이렇게 썼다. “지상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단색화 ‘전쟁’= 윤형근의 작품은 인근 갤러리현대에서도 최근 전시됐다. 22일 끝난 이 화랑 45주년 기념 ‘한국의 추상회화’전에서다. 이같은 재조명은 지난해부터 이어지는 단색화붐의 영향이다. 단색화는 70년대 미국의 미니멀리즘 및 일본의 모노하,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 등과 비슷한 시기 한국에 등장한 추상화다.
지난해 가을 서울 국제갤러리와 미국 블럼앤포 갤러리는 각각 대규모 단색화 전시를 마련했다. 지난달 아트 바젤 홍콩 기간 동안 소더비 경매사도 ‘아방가르드-한국 거장의 선들’이라는 제목의 단색화 전시를 기획했다. 다음달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벨기에 보고시안 재단 주최, 단색화 특별전이 열린다. 정창섭·박서보·정상화·하종현·이우환 등과 함께 그들의 예술적 스승으로 김환기를 내세운다. 이처럼 주요 화랑들이 겯고틀며 단색화 마케팅에 앞장서고 있다. ‘한물 간’ 그림 취급받던 단색화의 부활이다. 이들 중 몇몇이 오래도록 살아남을지는 또 한 번 시간의 평가를 거치게 된다.
권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