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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발] '엔저 공습' 경고음 어떻게 읽어야 하나 / 최우성

바람아님 2015. 5. 1. 09:41
한겨레 2015-4-30


인생에선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지만, 환율의 세계는 다르다. 속도는 방향을 단연 압도한다. 높이(환율 수준)보다 몇 곱절 무서운 게 쏠림현상(급격한 절상 또는 절하)이다. 냉혹한 국제금융시장의 생리는 체력이 약한 통화가 쏠림현상을 보일라치면 '급변침' 공격(환투기)에 나서고픈 유혹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자생적 '복원력'의 상실은 아마도 그 통화가 맞닥뜨릴 가장 불행한 운명일 게다. 스페인 은화가 유럽대륙을 뒤덮은 기축통화로 등장한 16세기 이래 다양한 버전으로 수없이 되풀이되는 '외환위기' 드라마의 기본공식이다.

최근 원-엔 환율의 가파른 하락세를 두고 말들이 많다. 원화에 견준 엔화 가치가 100엔당 800원대로 떨어진 건 7년2개월 만이다. 무한정 엔화를 시장에 쏟아내는 아베노믹스 등장 이후 약 3년 사이 엔화에 견줘 원화 가치는 70% 가까이 뛰었다. 자동차·선박·석유제품 등 우리나라 주력 수출제품의 해외시장 경쟁력에 결코 유리하지 않은 환경인 것만은 틀림없다. 곳곳에서 '엔저 공습'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리는 배경이다.

물론 한·일 두 나라 경제의 경합도는 예전보다 상당히 줄어들었다. 해외생산 비중이 확대됐고, 두 나라 모두 가격보다는 브랜드와 같은 비가격 경쟁력에 영향을 받는 성숙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최근의 원-엔 환율 움직임 속엔 차분하게 짚어봐야 할 몇 가지 포인트가 숨어 있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등락을 되풀이하겠으나 추세적으로는 원-엔 환율 하락이 상당 기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정부의 무제한 돈 풀기 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엔화의 구조적 약세는 '상수'나 다름없다. 최근 신용평가사 피치가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떨어뜨린 건 이와 무관치 않다. 반면, 원화 강세 추세를 쉽게 되돌릴 만한 요인은 많지 않다. 우리 경제는 현재 36개월째 경상수지 흑자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수출과 수입이 동시에 줄어드는 '불황형 흑자'가 외려 원화 가치를 떠받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바닥난 내수도 해외소비와 수입을 늘려 원화 강세를 누그러뜨리는 데 힘이 못 된다.

어쩌면 더욱 중요한 건, 국제정치질서 이면에 도사린 힘의 논리가 주요국 통화가치 변동에 끼치는 영향력이 부쩍 커진 현실일지 모른다. '강한 달러와 약한 엔화' 패키지는 사실 미-일 신동맹전략의 경제적 버전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입장에선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뿐 아니라 엔저 카드라는 또다른 '당근'이 필요한 셈이다. 물론 미국으로서도 무작정 달러 강세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자국 내 비난 여론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미국 정부는 일본을 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절상 압력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전략을 펼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얼마 전 미국 정부가 전례 없이 강한 톤으로 한국 정부의 '시장 개입'을 비판하는 환율보고서를 낸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화의 상대가격인 환율은, 결국 숫자 뒤편에 가려진 국제정치의 거울이다. 위기에 빠지지 않는 힘, 위기를 버텨내는 힘은 당연히 펀더멘털(기초체력)이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지각변동, 미세한 균열이야말로 한순간 위기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음을 지난 역사는 수많은 사례로 증명해주고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사례에서 보듯이, 2015년의 국제금융 무대는 옛것과 새것 사이의 힘겨루기 마당이다. '엔저 공습' 경고음을 마냥 호들갑이라고만 밀쳐내지 못하는 건, 경제와 외교 분야를 두루 망라하는 현 정부의 너무도 초라한 안목과 대처능력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최우성 논설위원morg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