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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 가라사대 "내가 유럽을 구원할지니"

바람아님 2015. 6. 6. 08:01

(조선일보 2015.06.06 이한수 기자)

18세기 유럽에 분 '孔子 열풍'
"명예혁명·케네의 자유경제론, 공자의 경전·철학이 모태 돼
동서양, 상호보완적 관계로 지속 가능한 新문명 만들어야"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황태연·김종록 지음|김영사|
368쪽|1만4800원

18세기까지 동양이 서양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앞서 있었다는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후 유럽의 발전이 공자(孔子)로 대표되는 동양 사상을 받아들인 덕분이라고 주장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책은 "서양은 계몽주의 시기 공자의 철학사상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위한 혁명운동을 일으켰다"고 
선언한다. 
계몽주의 시기는 1688년 영국 명예혁명에서 1789년 프랑스혁명까지 약 100년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 "공자 철학과 동아시아 문화예술은 유럽에서 그리스철학을 쓸어내고 유럽을 석권하게 됐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를 뒷받침하려는 실증 사료로 가득하다.

유럽에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 같은 유학 경전은 명예혁명 이전까지 대개 라틴어로 번역된 상태였다. 
16세기 마테오 리치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선교 목적에서 중국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를 유럽에 소개했다. 
중국과 공자에 대한 첫 연구서는 영국인 존 웨브가 영어로 쓴 1669년 저작이다. 
그는 "중국의 군주정은 바른 이성의 정치원리에 따라 구성된 이 세상 유일한 군주정"이라면서 
"영국 군주는 중국 고대 황제들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국왕 찰스 2세에게 충고한 이 저작이 나온 20년 후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유럽 지식인들은 공자 철학과 중국의 정치에서 중세 유럽을 구원할 빛을 보았다. 
18세기까지 유럽은 마녀사냥 같은 '야만 행위'가 신(神)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중국의 법률이 얼마나 아름답게 공적 평온과 사회 질서의 확립에 맞춰져 있는지를 말로 형언할 수 없다"면서 
"실천 철학의 가장 위대한 적용과 완벽한 생활 방식을 중국인에게서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중국의 법치를 예찬한다. 
"다른 나라에서 법은 범죄를 처벌한다. 중국에서 법은 더 많은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 법은 덕행을 포상한다.
" 볼테르는 "엄격한 시험(과거제도)을 거쳐 구성원을 선발하는 정부보다 더 나은 정부를 상상할 수 없다 "면서 
"사람들의 생명·명예·복지가 법률에 의해 보호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중국"이라고 했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존경할 만한 시대는 사람들이 공자의 도를 따르는 시대였다"고 했다.

孔子 가라사대
유럽 지식인은 경제 정책에서도 공자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중농주의 자유경제론을 창시한 프랑수아 케네는 중국을 발전 모델로 여겼다. 
생산·분배·유통·소비를 자유롭게 방임해야 한다는 케네의 '레세페르(laissez-faire)'는 공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에서 나왔다. 
케네는 초기 저작에서 자신의 주장이 공자와 중국의 정책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기다 말년인 74세 때 출처를 밝힌다. 
그는 1767년 출판한 '중국의 전제주의'에서 프랑스와 중국의 제도를 비교하면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인구 밀도가 높고 가장 번영하는 왕국이다. 중국에는 세습 귀족이 없다. 
공적과 능력만이 받아야 할 지위를 만든다"고 예찬했다. 
케네를 계승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말한 '자연지험(自然之驗)'과 동일한 
경제 개념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18세기 유럽에서 '공자 열풍'이 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유럽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주장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영국 신사계급(젠트리)이 중국의 관료제와 제한군주정을 보고 각성을 일으켜 의원내각제를 창출했다든지, 
데이비드 흄이 중국의 권력분립에 감명을 받았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제임스 매디슨이 흄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탄생도 중국의 영향이 있었던 셈"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감이 있다. 
일부 임금 통계 등을 내세워 18세기 조선이 영국보다 잘살았던 것은 물론 중국보다 앞선 '생활수준 세계 1위 국가'였다는 
주장에서는 '국수주의' 냄새가 피어오른다. 
반론을 예상한 듯 저자는 "18세기 조선은 스스로 부족한 것 없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어느 문명이건 오만은 곧 정체와 퇴보를 부른다"고 썼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의 5권짜리 대작 '공자와 세계'(2011)를 작가 김종록씨가 대중서로 풀어 썼다. 
논쟁적인 부분이 많지만 방대한 자료 제시는 놀랍다. 
"역사 속에서 융성했던 모든 문명은 '짜깁기 문명'이었다. 
서구와 동양은 상호보완적으로 연대해 지속 가능한 신문명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결론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 =======================


孔子 연봉 ‘좁쌀 6만’은 280명 1년 양식
   
(
2012/09/01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출처 : http://blog.chosun.com/bsjh2/6586960)

孔子 연봉 ‘좁쌀 6만’은 280명 1년 양식

군자가 재물 멀리했다는 건 편견

포청천은 월급 많아 청백리 가능
중국 역대 인물 14명의 실생활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
리카이저우 지음
박영인 옮김, 에쎄
408쪽, 1만8000원



먹어야 산다. 누구나 그렇다. 이는 노동과, 나아가 돈과 연결된다. 
자급자족 사회가 아니라면 당연하다.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이 엄연한 현실을 잊는다. 
특히 위대한 사상가, 유명한 문인, 용맹한 장군의 행적을 좇으면서 
‘생활’을 빠뜨린다. 
그들이라고 심오한 사유만 하거나 시를 짓거나 전쟁만 한 건 아니다.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사상에 압도되고, 작품에 홀리고, 전과에 눈이 부신 탓이다. 하지만 이건 허울만 보는 격이다. 
한 인간으로서 위인을 봐야 그 온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 할 수 있다.

 중국의 30대 칼럼니스트가 쓴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자에서 장제스(蔣介石)까지 중국의 역사적 인물 14인의 경제생활을 파헤쳐 이들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공자의 살림 형편은 어땠을까. 한 번도 갖지 않았던 의문이다. 노나라 관리였던 숙량흘의 서자이자 차남이었던 공자는 변변한 유산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지은이에 따르면 곤궁하지 않았다. 
덕치주의를 설파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며 때로는 식량이 
떨어지는 등 고생했다는 기존 인식과는 좀 다르다.

 기원전 497년 공자는 위나라로 건너가 영공(靈公)의 
부탁으로 관학에서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다. 
이 때 연봉이 ‘좁쌀 6만’이란 기록이 있다. 
이 연봉을 현대식으로 계량하니 90톤이다. 
280명이 일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공자 가족이 4명이었으니 온 가족이 몇 십 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돈으로 얼마인지 가늠이 어렵지만 막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도 상당했다. 
북위 때 나온 『수경주(水經注)』에 공자의 집에 관한 기록이 실렸다. 
방은 3칸이었다지만 대지가 100묘, 현재 단위로 2만여㎡다. 이 정도면 집이 아니라 농장이다. 
당시 중국의 주택 개념은 경작지를 포함한 가족농장형이었음을 감안해도 일반가구가 5묘였던 
점에 비춰 보면 꽤나 호화주택이었던 셈이다.

 공자의 살림살이만 넉넉했던 게 아니다. 
그의 적통을 이은 맹자는 더 풍요로웠다. 
맹자가 제나라의 경(卿)으로 잘 나갈 때 연봉이 좁쌀 10만 종이었다. 
현대 계량법으로 1만5000톤이다. 공자 연봉의 100배가 넘었다. 
뿐만 아니다. 맹자 역시 벼슬살이를 오래하지 않았는데 제나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를 흠모한 송나라와 설나라 임금이 각각 황금 70일(鎰), 50일을 선물로 보냈다. 
이게 또 귀향 여비치곤 어마어마하다. 미터법으로는 36㎏이나 되니 말이다. 
지은이는 이 정도면 귀향 여비가 아니라 호화판 세계일주 여행이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책은 물론 위인들의 ‘뒷담화’를 하자는 게 아니다.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 
벼슬을 버리고 은둔의 삶을 산 시인 도연명은 가난에 허덕였으며, 
판관 포청천이 청백리의 표본이 된 데는 엄청나게 많은 월급이 한몫 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돈 버느라 골몰하는 이는 ‘군자’가 아니고, 인격이 고매한 사람은 경제와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전통적 가치관은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오해한 역사적 왜곡이라 주장한다. 유가는 물질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으며 단지 이롭지 못한 방법으로 돈 버는 것을 경계했다고 
지적한다.

 이쯤 되면 책의 의도에 의구심이 생긴다.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현대 중국의 경제우선주의를 변호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원제도 ‘군자는 재물을 사랑한다(君子愛財)’여서 그런 혐의가 더욱 짙다. 
그럼에도 책에는 재미와 의미가 함께 담겼다. 
기존의 고전해설서나 역사책에선 만날 수 없던 사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족. 책 제목은 조금 엇나갔다. 
자 맹자 등 ‘위인’만 다룬 게 아니라 삼국지의 조조, 
중국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명나라 세종 때 재상 엄숭이나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도 포함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