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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영화로 배웠네] (21)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요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바람아님 2015. 6. 21. 09:35

[중앙일보] 입력 2015.06.12





“피곤해”의 “해”와 함께 들려왔습니다. 이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고 있다는 경고음이. 그 때 우리는 원거리 연애 중이었습니다. 차로 두 시간 걸리는 거리를 그는 주말이면 힘든 기색없이 달려오곤 했죠. 어느날 불쑥 말하더군요. 이번 주말엔 가지 않겠다고. 순간 심장에 칼바람이 붑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줄 모르고 상하기 시작한 우유를 벌컥 들이켰을 때처럼, 당혹스럽습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의 연애는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알았던 것 같아요. 아, 이 사랑은 머지 않아 끝이 나겠구나.

조제는 언제 경고음을 들었을까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나오는 다리가 불편한 여주인공 조제 말입니다. 대학생 츠네오와 동거를 시작한 지 1년, 둘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원래는 가족들에게 조제를 소개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츠네오는 중간에 마음을 바꿉니다. 운전석 옆자리에서 재잘대는 조제에게 그가 "운전중이잖아!"리고 짜증스럽게 대꾸했을 때, 혹은 등에 업힌 자신을 무거워하며 "훨체어를 사자"고 말했을 때, 조제의 마음에도 칼바람이 불었을까요. 집으로 돌아오기 전 들른 해변에서 두 사람은 사진을 찍습니다. 츠네오의 등에 업힌 조제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오는 호르몬 도파민은 길게는 3년까지 계속된다고 어떤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마약을 했을 때처럼 사람을 흥분시키고 감각을 마비시키는 호르몬이죠. 사랑에 빠졌을 때 저지르는 그 수많은 '미친 짓'들은 이 호르몬의 조종 때문입니다. 미국 코넬 대학의 신시아 하잔 교수라는 분은 '사랑의 300일 유통기한설'을 제시했네요. 연애를 시작한 지 1년 후면 열정이 50% 이상 급격하게 하락해 많은 연인들이 사랑과 이별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과학같은 건 잘 모르겠고, 경험상 사랑의 유통기한은 '케바케'인 것 같아요. 사람에 따라,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 처했냐에 따라 둘쭉날쭉 제멋대로 달라지는.

신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전해집니다. 연락이 뜸해지는 게 가장 흔하죠. 하루에 열번씩 전화하던 그가 하루 종일 연락이 없을 때, 내 카톡에 10초 이내에 답하던 그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슬프게도 사랑이 더 많이 남아있는 쪽이 그 신호를 민감하게 감지합니다. 때론 얼핏 스쳐가는 표정일 수도 있고, 무심코 튀어나온 단어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겨울, 밤늦게까지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그를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도착했다고 연락을 했는데 곧 나온다던 그는 1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이 분노로 바뀌며 머리에서 스팀이 치솟을 때쯤,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의 발소리가 들리더군요. 반가움이나 설렘 같은 건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그 무미건조한 발소리를 들으며, 또 슬픈 예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는 알콩달콩 예쁜 장면도 많습니다. 조제가 탄 유모차를 밀며 함께 언덕길을 내달리는 두 사람,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보며 손을 꼭 부여잡는 모습은 사랑에 빠져있던 그 찬란한 한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들 사랑의 유효기간은 1년 몇 개월을 넘지 못했죠. 그걸 확인한 날 조제는 옆에서 이미 잠든 츠네오에게 속삭입니다. "언젠가 자기가 없어지게 되면 난 미아가 된 조개 껍데기처럼 혼자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모든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 이렇게 딱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혹은 휴대폰 배터리를 체크하듯 현재 그의 사랑이 몇 퍼센트 남아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간당간당할 땐 얼른 충전기를 꽂을 수 있다면. 그러면 내 의도와는 상관 없이 상하기 시작한 사랑을 붙들고 안절부절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에요.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기에 둘 중 한 사람은 급작스럽게 다가온 사랑의 끝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츠네오가 떠나고 난 후 홀로 남아 1인분의 생선을 묵묵히 굽던 조제처럼 말이에요.



조제의 진짜 이름은 쿠미코였습니다. 조제는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달 후 일년 후』의 여주인공 이름입니다. 영화에는 책 속 이 구절이 등장합니다.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지고. 모든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유효기간이 지난 사랑을 부여잡고 계신가요. 먼저 식어버린 게 어느 쪽이었든, 언젠가 우린 서로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흘러간 시간이 거기에 남겠지요. 그래서 더 슬픈 것도 같고, 그나마 다행인 것도 같습니다.

비오니센치해진 기자 ilovetsumabuki@joongang.co.k*r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중 한 명입니다. 다양한 문화 콘텐트로 연애를 다루는 칼럼은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