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5-6-27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합니다. 벌써 10년이 넘었을 것입니다. 볼이 얼얼하게 마비될 정도로 강원도 철원의 겨울은 참으로 시렸습니다. 민통선 안의 자연학교로 발걸음을 향하던 제게 끼룩대며 보금자리로 날아 들어가는 수많은 쇠기러기 무리들이 보였지요. 너른 들에서 먹이를 먹고 밤을 쉬기 위해 들어가는 길목이었겠죠. 들고 있던 허접한 카메라로는 어두워져 가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브이(V)자의 쇠기러기들을 그냥 찍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플래시를 터뜨렸고 평화로이 날던 쇠기러기들은 깜짝 놀라 이리저리 흩어지기 바빴습니다. 하늘에는 놀란 쇠기러기들이 내는 경고음으로 가득 찼고, 카메라 액정에는 두 눈이 반짝거리는 어두운 형상의 기러기들이 날고 있었죠. 참으로 무지하게도 아무 생각 없었던 시절입니다. 과연 그때 오리와 기러기, 두루미들이 날아오르는 멋진(?) 광경을 찍기 위해 차로 들이밀고, 돌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과 제가 무엇이 달랐을까요? 지루함과 고독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졸음에 빠져든 동물원의 원숭이에게 냅다 소리 질러 깨워대는 관람객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어디까지가 방해가 되고, 어느 수준이 허용되는 것인지 결정짓기 어렵습니다. 멋진 생태사진으로 야생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배우는 순기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알아야 사랑을 하고 행동을 하죠. 하지만 결과가 모든 과정을 합리화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사진이라 하더라도 동물에게 해가 된다면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의 문제는 결국 윤리의 영역입니다. 법으로 규제하고 단속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을뿐더러 최종적 해결 방안이 되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한 개선된 문화의 정착이 중요합니다. 양적 팽창이 질적 전환을 이끌어내는 경우겠지요. 아픔을 겪고 성숙하는 것처럼, 우리의 탐조 문화도, 야생동물을 사랑하는 방식도 이번 사건을 통해 한번 또 변할 것입니다. 카메라가 앞서는 문화보다 망원경이 앞서는 문화로 바뀌겠지요. 그들을 존중하고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야생이라는 그들의 집에서 그들을 조용히 만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아무리 동물원 호랑이가 멋지다 한들, 문득 눈앞에 나타난 야생의 고라니 한 마리가 우리의 심장을 더 뛰게 만드는 이치입니다. 10년이 지나도 가슴에 남는 것은 러시아 오솔길 한가운데 나 있던 호랑이 발자국입니다. 그게 바로 야생의 힘입니다. <끝>
김영준 국립생태원 동물병원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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