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중앙시평] 배신의 경제학

바람아님 2015. 7. 16. 10:50

[중앙일보] 입력 2015.07.16

복거일/소설가

 

‘배신의 정치’라는 말에선 상황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장기가 잘 드러났다. 그리고 유승민 의원의 행적은 그 표현을 더욱 적절하게 만들었다. 배신이 흔한 정치판에서도 유 의원처럼 ‘주군’을 철저하게 배신한 경우는 드물다.

 먼저, 유 의원은 개인적 차원에서 배신했다. 그는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셨고 덕분에 정치계에서 도약할 수 있었다. 소원해진 과정이 어떠했든 그가 박 대통령에게 맞서서 끝까지 괴롭힌 것은 일단 심각한 배신이다. 당과 청와대 사이의 조율은 일차적으로 당 대표의 몫이므로 원내대표는 대통령과 직접 맞설 일이 드문 직책이다. 첫 연설에서 느닷없이 대통령 공약을 거짓말이라 몰아붙인 뒤 그는 대통령과 맞서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굳이 맞섰다.

 헌법 첫 조항의 가치를 지키려 애썼다는 고별사는 특히 가관이다. 우리 사회에 민주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있어서 자신이 그들과 싸웠다는 얘기인데, 정황으로 보아 종북 세력을 가리킨 것은 아니니 박 대통령을 넌지시 겨냥한 셈이다. 해괴하다.

 박 대통령의 군주적 지도력은 줄곧 논란을 불렀다. 그래도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지 민주공화국을 바꾸거나 훼손하려는 의도의 문제는 아니다. 훨씬 군주적이었던 드골 프랑스 대통령도 민주공화국을 위협한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다. 분김에 했겠지만 모함에 가까운 이 발언에 대해 유 의원은 국민과 대통령에게 사과해야 한다.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이 발언은 긴 정치적 여정을 앞에 둔 재능 있는 정치인을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믿어야 협력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 믿도록 하는 장치로 진화한 것이 도덕이다. 그런 뜻에서 개인적 차원의 배신이 가장 부도덕하다. “만일 내가 조국을 배신하는 것과 친구를 배신하는 것을 골라야 한다면 내가 조국을 배신하는 것을 고를 배짱이 있기를 바란다”는 한 작가의 고백은 우리 가슴 깊이 울린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쓰디쓰게 내뱉는 말이 ‘배은망덕’이다.

 둘째, 유 의원은 새누리당을 배신했다. 대통령은 정당의 후보로 선거에 나서고 정당을 정치적 바탕으로 삼아 국정을 수행한다. 집권당 원내대표는 입법을 통해 정권이 공약을 이행하도록 돕는다. 불행하게도 유 의원은 시급한 법안들의 통과에 진력한 적이 없다. 국회선진화법을 면죄부로 휘두르면서 야당이 오히려 환호하는 행태를 보여 박 대통령으로부터 ‘자기 정치’라는 비난을 들었다. 입법의 부진으로 초조해진 대통령의 절절한 얘기에 대해 “화를 푸시라”고 해서 대통령의 호소를 감정의 폭발로 치부하는 결례까지 했다. 대통령과 원내대표 사이의 일은 본질적으로 정당 차원의 문제인데, 입법부와 행정부의 대립이라는 틀로 유도해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했다. 그리고 굳이 자리에서 내쫓기는 절차를 고집해서 당의 분열을 깊게 했다.

 셋째 배신은 지식의 차원에서 나왔다. 주류 경제학을 공부했고 국책 연구기관에서 일했으며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선 ‘줄푸세’라는 자유주의 공약을 입안하는 데 기여했으므로 그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의회에서 잘 설명하고 지지를 확산시킬 수 있었다. 그런 기대를 첫 연설에서 깨뜨리더니, 급기야 ‘사회적 경제’라는 것을 들고나왔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우리 경제 체제에 너무 이질적인 그 개념을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은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전범으로 꼽는다.

 주류 경제학은 방법론적으로 튼실하고 이론적으로 정교해서 주류 경제학자들의 판단은 다른 분야 학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동질적이다. 그래서 유 의원이 보인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좋은 직장과 많은 재산을 누리면서 권력을 좇더니 뒤늦게 ‘강남 좌파’로 변신한 셈이다. 프랑스 사상가 쥘리앵 방다의 탄식대로 이런 지적 배신이 현대 사회에 가장 해롭다.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의 심리적 비용보다 거기서 얻을 이익의 심리적 가치가 클 때 배신이 나온다. 양심의 가책도 둘레의 지탄도 당장의 자기 이익을 위해 감내할 수 있는 사람만이 배신할 수 있다. 이처럼 배신이 유난히 자기중심적인 성품에서 나오므로 한 번 배신한 정치인은 다시 배신하게 마련이고 끝내는 국민을 배신한다.

 사람은 ‘도덕적 동물’이어서 작은 배신에도 큰 심리적 비용이 따른다. ‘배신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박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 배신은 그래서 대단한 결단이다. 원내대표였던 단 몇 달 동안 개인적, 정치적 및 지적 배신을 효과적으로 해냈다는 것은 그의 배신이 오래 준비되었음을 가리킨다. 그의 계산대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거대한 불만을 돛폭에 받고 배신의 항로는 거침이 없다. 배신의 경제학은 늘 얄궂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