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전, 이승만 대통령은 세 차례 '행동'에 나서 의원내각제로 굳어져 가던 제헌헌법을 대통령중심제로 바꿨다.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가 의원내각제 헌법안을 한창 다듬던 1948년 6월15일,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이승만 국회의장은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책임제가 현 정세에 적합하다"고 밝혔다. 기초위원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각제를 고수했다. 6월21일 이승만은 헌법의 "제일 중대한 문제"를 기초위원회 대신 국회 전원위원회에서 협의하자고 제안한다. 두번째 공세였던 이 동의안은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치욕적 패배를 당한 이승만은 그날 오후 "만일 이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이 헌법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치적 협박이었지만, 이승만 없이는 정부 수립이 불가능했던 당시 현실에선 국회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헌법 초안은 그날 밤 서울 계동의 김성수 집에서 불과 10여분 만에 대통령제로 바뀌었다. 대통령중심제의 기이한 발생사다.
대통령제가 독재로 이어지리라는 걱정은 그때부터 있었다. 그래서 제헌국회 본회의에선 대통령의 거부권 삭제,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추천권 등 대통령을 견제하는 방안이 여럿 논의됐지만 8월15일 정부 수립에 맞춰 헌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이승만의 재촉 속에 대부분 무산됐다. 그나마 국회의 국무총리 동의, 국무위원의 국회 출석, 국법상 행위에 대한 국무위원의 부서, 국무원의 심의체 운영 등 내각제적 요소가 몇몇 살아남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후 이를 대부분 무시했다. 대통령제는 탄생 직후부터 제도의 틀을 벗어난 괴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없는 권한까지 휘두른 대통령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비상조치를 선포해 유신체제의 길을 열었지만, 비상조치 선포 당시의 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나 헌법 조항 효력정지권한은 없었다. 유신을 반헌법적 친위쿠데타로 보는 이유다. 그 뒤의 유신체제는 제헌국회 당시의 걱정대로 대통령제라기보다 '총통제'였다.
그로부터 몇십년이 지난 지금 '제왕적 대통령' 행태가 다시 문제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수십년 전처럼 대통령의 의중이 통치의 기준이다.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른 여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쫓겨나고, 겁에 질린 여당은 대통령의 귀에 달콤한 말만 한다. 거기에 야당까지 무력하니, 국회는 삼권분립의 이상인 행정부 견제는커녕 제헌의원들이 우려한 대로 자문기구로 전락한 듯하다.
제헌 때부터 의결기구 혹은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는 심의체로 구상됐던 국무회의도 장관들이 대통령의 말을 받아적기 바쁜 교실이 됐다. 총리나 장관의 말은 이제 뉴스에서 찾기도 어렵다. 대통령이 만사를 깨알같이 지시하고 장관에겐 별 권한이 없다는 것을 다들 아는 터에 누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상당수 관료들이 손을 놓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인사든 정책이든 청와대에서 몇달씩 지체되고 엉뚱하게 결정되기 일쑤이니,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국정의 규모와 복잡함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그렇게 틀어쥐고만 있으니 더 문제다. 이렇게 가다간 국정의 곳곳에서 손발이 마비되는 증상이 심해질 것이다. 과거 한때처럼 효율이나 안정을 내세울 수 있는 처지는 이제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7월17일은 제헌헌법이 공포된 날을 기리는 제헌절이다. 예나 이제나 권력구조는 헌법의 중대사다. 태생부터 한 사람의 뜻에 휘둘려 뒤틀려왔던 대통령제는 이제 그 한 사람의 용량 부족 문제까지 떠안게 됐다.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고민하고 제대로 토론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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