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5-7-16
도쿄 거리의 분위기부터 과거 방문 때와는 달랐다. 쇼핑가며 식당가며 어딜 가나 활기가 느껴졌다. 일요일 오후 귀국 길에는 도쿄 외곽에서 하네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고속도로가 너무 막혀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현지 안내 기업인은 “1~2년 전까지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던 길이 세 시간 넘게 걸린다”며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주말 나들이를 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의 진행 상황도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통화와 재정정책으로 돈만 잔뜩 풀고, 세 번째 화살인 구조개혁은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기업들 스스로 ‘이대로 가면 죽는다’는 각오로 사업모델을 완전히 바꿔 변신에 성공하는 사례가 잇따라 나오고 있었다. 정부와 정치권은 산업정책 전환과 규제개혁을 위해 재계와 단단히 손을 잡고 있었다. 아베 총리가 공을 들이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시대가 열리면 일본 내수 유통 시스템의 폐쇄성 등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란 기대도 컸다.
아베노믹스의 가장 큰 성과는 기업과 가계에 희망과 자신감을 되찾아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투자와 소비 증가, 청년실업 해소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대졸자·고졸자 취업률은 모두 97%에 달해 원하는 사람은 거의 다 일자리를 얻고 있다. 비정규직 비중이 점차 줄어드는 등 고용의 질 또한 개선되고 있다. 이는 저출산으로 구직자 수가 줄어든 영향도 있지만 기업들이 채용을 늘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회복하고 있는 게 ‘엔저 효과’ 덕만은 아니었다. 그전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노력이 있었다. 3년 전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가 부활한 파나소닉이 대표적인 사례다. 파나소닉은 잇단 사업확장 실패와 한국 기업들의 공세 때문에 2011~2012년 연달아 7000억 엔대(약 7조원)의 적자를 냈다. 기업신용이 투기등급으로 강등됐고, 주가는 폭락을 거듭했다. 결국 문을 닫게 될 것이란 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지난해 3800억 엔의 영업이익을 낸 알짜 회사로 거듭났다. 가전 등 B2C(소비자시장) 사업을 정리하고, 자동차·항공·주택·에너지 기업들에 중간 소재나 부품을 공급하는 B2B(기업시장) 쪽으로 사업구조를 전면 개편한 결과였다. 경쟁력을 유지하기 힘든 사업을 과감히 버리고, 잘할 수 있는 사업모델에 역량을 집중했던 것이다.
히타치 역시 주력 사업을 완전히 바꿔 살아난 케이스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시장을 휘어잡았던 반도체·가전 분야를 포기하고, 지금은 전자재료·철도차량·발전설비 분야의 강자로 변신했다. 히타치는 2008년 7800억 엔의 적자에서 지난해 6000억 엔의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후지필림도 화장품·의약품·인쇄기기·전자소재 등으로 주력 사업을 개편했다. 이렇게 혁신에 성공한 사례가 잇따라 나오면서 지난해 영업이익 1000억 엔(약 1조원) 클럽에 가입한 기업이 모두 90개로 전년보다 10개나 늘었다. 올해는 100개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다. 이들 기업은 미래의 성장 스토리를 다시 쓰면서 최근 1~2년 새 주가가 100% 이상씩 급등했다.
일본은 우리의 경제개발 역사에 있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일본이 우리 이웃에 없었다면 산업화 초기에 필요한 원천기술과 사업 아이디어를 확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은 절대 따라 해선 안 될 시행착오들을 가르쳐줬다. 지금은 다시 난국 타개를 위해 뭘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정부와 정치권, 기업과 가계 모두 20년 전 일본이 잘못 선택했던 길로 자꾸 빨려드는 것 같다. 일본처럼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일까.
김광기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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