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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ㅣ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④ 고무-2 고무산업 눈부신 발전 뒤엔 열대우림과 원주민 피눈물이…

바람아님 2015. 7. 20. 18:25

(출처-조선일보 2009.12.14 주경철)


[문화ㅣ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④ 고무 

고무산업 눈부신 발전 뒤엔 열대우림과 원주민 피눈물이… 


:: 멸종 위기 속 유럽·아시아 실험재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과도한 채취로 인해 헤베아 속 나무들이 멸종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이 나무를 외지로 빼돌려서 다른 열대지역에서 기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이는 가장 유명한 ‘자원 해적질’의 사례에 속한다. 하여튼 결과적으로 보면 만일 일찍이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1890년대에 진행되었던 산업화는 불가능했거나 훨씬 지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무나무 이식(移植)의 주인공(혹은 주범)은 헨리 위크햄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1876년에 7만개의 헤베아 속 고무나무 씨앗을 영국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도 이런 식의 불법 해외유출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브라질의 가장 중요한 수출 자원인 

고무나무의 경우는 강력한 단속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왕 폐하의 식물원에 보낼 식물 표본을 보낸다고 교묘하게 

관리들을 속여서 씨앗을 증기선에 실을 수 있었다. 운도 따라서 그가 수집한 씨앗들은 헤베아 속 나무 가운데에서도 수액이 

가장 많이 나는 데다가 치명적인 남미잎마름병(South American Leaf Blight·SALB)에 강한 종자들이었다. 

다른 종류의 씨앗들은 자연 상태가 아닌 농장에서 기를 경우 이 병에 잘 걸려서 재배가 불가능했다. 

위크햄이 빼돌린 씨앗들은 런던의 유명한 큐(Kew) 식물원에서 발아하여 묘목으로 자라났다. 지극 정성으로 키운 이 묘목들이 

캘커타, 실론, 남부 인디아, 버마 등 아시아 여러 지역에 보내져서 실험 재배되었다. 그러나 초기 실험은 대개 실패로 끝났다. 

역시 아마존 지역과는 기후가 다른 것이 문제였다. 고무나무가 잘 자라려면 건기가 없이 항상 습기와 온도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곳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였다. 고무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말레이시아에서는 

커피 재배가 줄고 대신 고무나무 재배가 늘어났다. 1901년에는 말레이시아에서만 100만그루의 고무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이후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 농장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쿨리·苦力)이 동남아시아로 몰려들었다.




▲ 1 20세기 초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서양 고무 채취업자들에게 

고용된 군인들에 의해 손목이 잘린 주민들. 

2 수액채취 3 합성고무생산(1941년) 



:: 벨기에 식민지 콩고의 잔혹사 


서구 각국은 모두 자기 식민지에서 안정되게 고무를 공급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다 영국과 네덜란드처럼 

고무나무 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지는 못했다. 그럴 경우 무리해서라도 식민지 열대우림에서 고무 수액 채취를 확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벌어진 일은 몸서리쳐지는 잔혹성으로 악명을 떨쳤다. 

콩고의 고무 수액 채취는 벨기에의 국왕인 레오폴드 2세 개인의 사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겉으로는 인도주의자인 척했지만 실제로는 식민지에서 최대의 이윤을 끌어내기 위해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했다. 

콩고에서 고무 수액을 채취하는 나무는 푼투미아 엘라스티카(Funtumia elastica) 종으로서, 긴 해면질 넝쿨이 나무를 타고 

30m 높이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가지를 쳐서 다른 나무로 뻗어가는 특징을 가졌다. 

원래는 이 넝쿨의 표면을 살짝 벤 다음 그곳에서 나는 수액을 받아야 하지만 넝쿨을 완전히 절단하면 더 빨리 채취할 수 

있으므로 관리들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모두 그런 식으로 일했다. 그 결과 마을 주변의 넝쿨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이제 수액을 채취하려면 하루나 이틀 거리를 걸어가야 했고 그나마 지상에서 가까이 있는 넝쿨이 바닥난 후에는 점점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등이 부러져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쏟아 붓듯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표범의 공격 위험에 시달리며 나무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는 이런 힘든 일은 누구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을 강제로 

시키려면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은 사람들을 볼모로 잡는 행위였다. 마을을 덮친 군대는 여자, 어린아이나 노인 혹은 

이장을 볼모로 잡은 다음 마을 사람들이 고무 수액을 가져와야 풀어주었다. 그동안 여자들은 흔히 강간을 당했고 형편없는 

식사 등으로 풀려난 다음에도 죽는 일이 많았다.


콩고에서 영업하는 회사는 흔히 할당제도를 도입하였다. 각 마을에 할당된 양은 대개 한 사람당 2주 동안 말린 고무 3~4㎏ 

수준이었다. 이 할당량을 채우려면 숲속에서 한 달에 24일 정도 일해야 했다.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시코트

(chicotte·하마가죽을 말려서 만든 나선형의 채찍)로 매질을 당했는데 맞다가 의식을 잃는 것은 태반이고 100대 정도를 

맞으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고무 채집에 협력하지 않는 마을은 군대의 공격을 받고 몰살당했다. 유럽 장교들은 아프리카 

동맹군에 학살을 대행시키면서 총알을 제대로 사용했다는 증거를 요구했고 그래서 아프리카 군인들은 시체의 오른손을 

잘라서 훈증 처리하여 가져왔다. 그렇지만 군인들은 때로 사냥에 총알을 사용하고는 산 사람의 오른손을 절단해 오기도 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열대우림 지역에 지워지지 않는 잔혹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은 이런 지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이 사업이 결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사람만 피폐해진 게 아니라 고무를 채취할 수 있는 넝쿨들이 다 소진돼 끝내 멸종했기 때문이다. 

이후 세계의 고무 공급은 거의 100% 아시아의 고무 농장이 담당했다. 


:: 2차대전 계기 합성고무 시대로 


고무의 역사에서 다시 한번 획기적인 전환이 찾아온 계기는 2차대전이었다. 고무는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 중 하나였다. 

고무가 없으면 전투기도, 탱크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이유도 석유나 고무 같은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공격해 들어가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 우선 미국의 해상력을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핵심 전략 물자인 고무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원래는 미국 자생 식물에서 고무 수액을 채취하려는 계획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화학적으로 합성고무를 생산하자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합성고무 생산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은 

차르 시대 러시아의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공업용 알코올에서 부타디엔(butadiene)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을 더 발전시켜서 합성고무 생산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화학공업이 발달했던 독일이었다. 

나치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을 입수한 미국은 화학산업계가 총동원되어 이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1945년에는 100만톤 이상의 합성고무를 생산해 내서 나치 독일을 압도했다.


 오늘날에는 고무가 너무 많이 쓰여서 오히려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작은 것으로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고무줄부터 냉장고와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을 거쳐 자전거와 자동차의 바퀴, 

그리고 기계에 들어가는 각종 고무 부품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 구석구석 고무가 안 쓰이는 곳이 거의 없다. 

과거 동물 내장 껍질로 만들던 콘돔을 고무나 라텍스(고무수지)로 만들게 된 것은 고무가 우리 피부에 얼마나 밀접하게 닿는 

물질인지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이렇게 고무가 현대사회의 등장을 가능케 해준 이면에는 ‘열대우림의 눈물’의 역사가 있다.  



/ 주경철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네덜란드사 전공). 

현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문화로 읽는 세계사’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문명과 바다’ 등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