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주간조선 2009.12.28 주경철)
- 1636년 12월에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한 팸플릿은 희귀한 꽃을 피우는 튤립 구근 한 개를 팔아서 살 수 있는
- 상품 목록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 꽃 한 송이로 한 재산을 만들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전역에 휘몰아쳤던 ‘튤립 광기(Tulip mania)’는 역사상
- 가장 악명 높은 투기 사례 중 하나이며 최초의 자본주의적 버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엄격한 자기 규제를 특징으로 하는 칼뱅주의(Calvinism)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 그처럼 엄청난 탐욕의 분출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아름다운 꽃이 투기의
- 대상이 되었을까?
튤립의 원산지는 파미르 고원으로 추정된다.- 자연 상태에서 이 꽃은 재배종보다는 키가 작고 색깔도 소박했지만,
- 아주 튼튼하고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자랐다. 중앙아시아 내륙 산간 지방의 모진 겨울
- 추위가 지나고 봄이 찾아올 때 강렬한 붉은빛으로 피어나는 이 꽃은 유목민족들의
- 사랑을 받아서, 그들과 함께 페르시아와 터키 지방으로 점차
- 퍼져갔다. 페르시아에서는 이미 11세기에 이 꽃을 재배하고 있었다.
:: 15세기 튤립은 터키의 꽃
15세기경에는 튤립이 터키에 전해져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튤립은 네덜란드의 꽃이기 전에 터키의 꽃이었다. -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최강의 문명을 이룩한 터키의 정원에서 가장 고귀한 지위를 누린 꽃이 바로 튤립이었다.
- 터키인들에게 정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유목민족들에게 낙원과 천국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정원이기 때문이다.
- 파라다이스(paradise)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페르시아어 아피리다에자(apiri-daeza)로서 이는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 가리켰다. 이 말이 고대 히브리어(pardes)와 그리스어(paradeisos)를 거쳐 유럽 여러 언어에 들어온 것이다.
- 에덴동산이 그와 같은 정원 모습을 한 낙원에 해당한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sultan·황제)들은 천국의 모습을 지상에 재현하기 위해 정원에 지극 정성을 기울였다. - 이곳에는 시원한 샘물과 분수가 있고 시내가 흐르는 가운데 온갖 꽃들이 피어나 있다. 이 지상천국을 화려하게 수놓는
- 여러 꽃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꽃은 단연 튤립이었다.
- 터키어로 튤립은 라레(lale)인데 이 말은 아랍어의 ‘알라’와 마찬가지로 신(神)을 가리킨다.
활짝 필 때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튤립은 신 앞에서 겸손을 지키는 고귀한 꽃이었다. - 그런데 오스만제국 시절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튤립은 이미 야생화와는 형태와 색깔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 꽃잎이 아주 길고 끝이 바늘처럼 뾰족한 형태로서 단검을 연상시키던 이런 꽃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찾기 힘들며,
- 사람이 인위적으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과거에 크게 유행했던 이런 꽃들은 오늘날 다 사라져서
- 단지 그림이나 도자기 문양에만 남아 있다.
- :: 튤립 때문에 권좌에서 쫓겨난 왕
오스만제국 시대 중에서도 특히나 튤립이 큰 인기를 누리던 아흐메트 3세 시절은 ‘튤립시대(1718~1730)’라고 불린다. -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던 이 시기는 궁정 사람들과 고관, 부유층 사람들이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별장에서 음주가무를
- 즐기고 음악·건축·시 등에서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던 호시절이었다.
- 당시 술탄의 정원에서는 봄마다 장대한 튤립 축제가 열렸는데, 그 화려함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 “정원 주변에 거울을 둘러 세워 전시장이 두 배 이상 넓어보이도록 했다.
- 각 품종의 이름은 은으로 만든 명패에 새겼다.
- 튤립 4개마다 초를 하나씩 세워 불을 켰는데, 이 초의 높이도 꽃의 키와 일치하도록 만들었다.
- 금박을 입힌 새장 안에서 새들이 노래를 불렀고, 커다란 거북 수백 마리가 등에 촛불을 지고 정원을 어슬렁거리며
- 돌아다니게 함으로써 전시장을 환상적인 조명으로 장식했다.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튤립의 색깔을 돋보이게
- 하고 조화를 이루는 색의 옷을 입도록 했다.”(마이클 폴란 ‘욕망하는 식물’, 152쪽)
- 그렇지만 이건 조금 도가 지나친 게 아닐까?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높더라 -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는 옛 노래 그대로이다.
- 엄청난 값을 치르며 페르시아와 네덜란드에서 수입하는 수백만 개의 튤립 구근 대금이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이
- 되었고, 결국 튤립이 한 시대를 끝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1730년에 ‘반(反) 튤립 봉기’가 일어나서 아흐메트 3세는
- 퇴위되었다.
술탄의 정원을 지키는 정원사(bostanji) 역시 이국적인 풍모가 넘쳐났다. - 이들은 튤립을 가꾸는 전문가 외에 호위병이자 짐꾼이자 경찰이자 사형집행인이었다.
- 왜 지상천국을 지키는 이 사람들이 사형 집행까지 맡아서 하는지 이유는 아리송하지만, 하여튼 하얀 모슬린 바지에
- 짧은 셔츠, 빨간색 테 없는 모자를 쓴 이 정원사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자루를 매달아 보스포루스해에
- 던져버리는 일을 담담하게 집행했다. 그중에서도 고급 관리들의 사형 집행은 수석 정원사의 몫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일은 사형 선고를 받은 고관에게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질 기회가 주어진다는 - 것이었다. 사형수와 수석 정원사는 정원을 통과해서 톱카피궁 최남단 집어장(集魚場)까지 800미터 거리를 달리기
- 시합을 한다.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달리는 이 경주에서 사형수가 정원사보다 빨리 도착하면 사형에서 추방형으로
- 감면되지만, 정원사가 더 빨리 도착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처형되어 시신은 바다에 던져진다.
- 1823년에 하지 살리흐 파샤라는 사람이 이 이상한 관례에 따라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바람장사(windhandel)’로 불렸던
- 튤립 선물거래를 풍자한 그림.
- :: 네덜란드인의 마음을 훔치다
유럽인들이 터키의 정원에서 처음 튤립을 보았을 때, 튤립은 이와 같은 이교적인 매력이 가득한 신비의 꽃이었다. - 튤립이라는 말은 터번(turban)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꽃 모양이 그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 누가 처음 튤립을 유럽에 들여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16세기 중엽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 모습을
- 드러냈고, 곧 여러 지역으로 퍼져갔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두어서 제2의 고향이 된 곳이 네덜란드였다.
- 이 나라에 튤립이 전파된 데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의 저명한 식물학자인 클루시우스였다.
- 그는 빈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식물학자로 활동하다가 1593년에 레이덴대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곳에
- 식물원 건립을 주관했다. 이 대학의 상징처럼 된 식물원(Hortus academicus)은 전 세계의 식물 자원을 들여와서
- 관찰하고 실험한 후 다시 여러 지역에 보급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발전했다. 클루시우스는 레이덴에 튤립 구근을 가지고
- 와서 재배했는데, 여기에서 꽃이 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그 꽃들을 훔쳐갔다.
- 오늘날 레이덴과 할렘 주변 지역에 봄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동산이 만들어지게 된
- 먼 기원은 다름 아닌 클루시우스의 꽃 도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 네덜란드 사람들이 튤립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이 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원에서 꽃을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 네덜란드의 또 다른 상징물인 나막신도 원래는 습기 많은 정원에서 일할 때 신는 덧신이다.
- 구름 많이 끼는 축축한 날씨에다가 진창 투성이인 풍경을 접해 보면 집집마다 꽃을 가꾸어서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 모습을 만들어보려는 이 나라 국민들의 노력이 저절로 이해가 된다. 문제는 왜 네덜란드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7세기에 이 꽃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광적인 투기의 대상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 투기장이 된 꽃밭
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 문제라면 급격한 경제 성장의 시대를 살아가던 당시 사람들의 심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그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빈민 출신 사람들이 단시간 내에 사회의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다.
- 야콥 포펜은 아버지가 시장에서 생선을 통에 담는 미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자신은 거부가 되었고
- 암스테르담 시장까지 역임했다.
심지어 바닝 콕이라는 사람은 유랑 걸인의 아들이었는데, 유럽 최고 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 이처럼 사회 전체적으로 부가 크게 증가하고 사회적 유동성이 큰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 역전’의 꿈을 품게
- 마련이다. 표면상으로는 종교적 자기억제와 합리적 관리를 내세우는 칼뱅의 교리가 지배적이었지만, 이면에는
-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 큰돈을 거머쥐어야 한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 ▲ 튤립 광기 시대에
- 유행했던 종자들.
- 처음에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된 꽃 재배가 한탕주의로 돌변한 데에는
- 튤립이 지닌 몇 가지 특이한 요소도 작용했다.
- 튤립을 많이 키우다 보면 100개 중 한두 개꼴로 특이한 무늬를 가진 꽃이 피어난다.
- 오늘날에는 이것이 특별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물론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 변종 가운데에서도 특히 강렬한 불꽃 무늬를 띤 꽃들은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합당한 이름도 얻었다.
- 예컨대 역사상 최고의 튤립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튤립종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는 푸른색과
- 흰색 바탕에 빨간 불꽃 무늬가 꽃잎 끝까지 뻗쳐 있었다.
이런 희한한 꽃일수록 심하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 튤립은 종자에서 자라나서 꽃이 필 때 아주 심한 변이를 나타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어떤 꽃이 필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 게다가 새로운 구근을 만들어내기까지 6~7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이 탐내는 멋있는
- 꽃들을 얻기는 아주 힘들었다. 자연히 이런 꽃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15길더 하던 ‘아드미랄’이 175길더로,
- 45길더 하던 ‘비자르덴’이 550길더 하는 식으로 꽃값은 계속 상승했다.
이왕 꽃을 재배하는 김에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발동해서 많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털어 텃밭 한 조각을 사가지고 - 구근을 키웠다. 화훼산업이 완전히 투기로 변모한 것이다. 아직 꽃이 피어나기도 전인 땅속의 구근에 대해서도 매매가
- 이루어졌다. 구매자는 미리 선금을 주고 나중에 피어날 꽃을 확보해 두었다가 실제 꽃이 피었을 때 훨씬 비싼 가격으로
- 되팔아서 큰 이윤을 남겼다.
오늘날에는 선물거래라고 하는 이 현상을 당시에는 ‘바람장사(windhandel)’라고 불렀다. - 이 바람이 모진 광풍으로 커진 것은 1636년부터 그 다음해까지다.
- 꽃값은 오르고 올라 급기야는 꽃 한 송이가 대저택 한 채 값이 될 지경이었다. 결혼 지참금 대신 비싼 튤립 구근 하나만
- 달랑 들고 가는 일도 벌어졌는데, 그래서 이 품종의 이름은 ‘내 딸의 결혼식’으로 붙여졌다.
- ▲ 터키에서 유행했던 단검 모양의 튤립이 그려진 이즈니크 도자기.
- :: 거품 붕괴하면서 날개 없는 추락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사람들은 이제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1637년 초에 사람들은 꽃을 시장에 내다팔려고 했다. 그렇지만 팔려는 사람만 있지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 오르던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격이 떨어졌다. 심지어 5000길더짜리가 50길더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 거들떠보지 않았다. 막판에 ‘상투를 잡은’ 사람들이 큰 손해를 입게 된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 버블이 터지고 한 바탕 광풍이 지나는 동안 네덜란드 사회는 적지 않은 충격을 겪었다. 꽃을 보는 시각도 사회마다
- 또 시대마다 다르다. 한 인류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는 원체 아름다운 꽃에 대한 동경이 약해서
- 종교 제의나 사회적 의례에서 꽃을 사용하지 않으며, 예술이나 종교에서 꽃의 이미지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 아마도 먹을 게 충분하지 않아 꽃을 기를 여유가 없고 생태적으로도 아프리카 원산 꽃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권처럼 외래 문명과 접촉하면서 새삼 꽃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는 있다. - 또 시간이 지나면서 꽃의 유행도 바뀐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늘 장미가 인기를 누렸는데,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 화려한 장미가, 빅토리아 시대에는 다소곳한 장미가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 한때 프랑스에서 히아신스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여(‘튤립 광기’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히아신스 열풍’을 일으켰지만
- 곧 사그라들었다.
꽃의 아름다움이 때로는 황제의 절대 권력을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추악한 투기와 결탁하기도 했다. - 그러나 튤립은 그런 먼 역사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는 유치원 아이들이 가장 쉽게 그릴 수 있는 순수한 꽃이 되었다.
/ 주경철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네덜란드사 전공).
현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문화로 읽는 세계사’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문명과 바다’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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