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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ㅣ주경철의 세계사 새로 보기] ⑤ 튤립꽃 한 송이 값이 대저택 한 채! 17세기 네덜란드 휩쓴 ‘튤립 투기’

바람아님 2015. 7. 27. 11:46

(출처-주간조선 2009.12.28 주경철)


1636년 12월에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한 팸플릿은 희귀한 꽃을 피우는 튤립 구근 한 개를 팔아서 살 수 있는 
상품 목록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꽃 한 송이로 한 재산을 만들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전역에 휘몰아쳤던 ‘튤립 광기(Tulip mania)’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투기 사례 중 하나이며 최초의 자본주의적 버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엄격한 자기 규제를 특징으로 하는 칼뱅주의(Calvinism)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그처럼 엄청난 탐욕의 분출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아름다운 꽃이 투기의 
대상이 되었을까?

튤립의 원산지는 파미르 고원으로 추정된다. 
자연 상태에서 이 꽃은 재배종보다는 키가 작고 색깔도 소박했지만, 
아주 튼튼하고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자랐다. 중앙아시아 내륙 산간 지방의 모진 겨울 
추위가 지나고 봄이 찾아올 때 강렬한 붉은빛으로 피어나는 이 꽃은 유목민족들의 
사랑을 받아서, 그들과 함께 페르시아와 터키 지방으로 점차 
퍼져갔다. 페르시아에서는 이미 11세기에 이 꽃을 재배하고 있었다.
 
:: 15세기 튤립은 터키의 꽃

15세기경에는 튤립이 터키에 전해져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튤립은 네덜란드의 꽃이기 전에 터키의 꽃이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최강의 문명을 이룩한 터키의 정원에서 가장 고귀한 지위를 누린 꽃이 바로 튤립이었다. 
터키인들에게 정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유목민족들에게 낙원과 천국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정원이기 때문이다. 
파라다이스(paradise)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페르시아어 아피리다에자(apiri-daeza)로서 이는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가리켰다. 이 말이 고대 히브리어(pardes)와 그리스어(paradeisos)를 거쳐 유럽 여러 언어에 들어온 것이다. 
에덴동산이 그와 같은 정원 모습을 한 낙원에 해당한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sultan·황제)들은 천국의 모습을 지상에 재현하기 위해 정원에 지극 정성을 기울였다. 
이곳에는 시원한 샘물과 분수가 있고 시내가 흐르는 가운데 온갖 꽃들이 피어나 있다. 이 지상천국을 화려하게 수놓는 
여러 꽃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꽃은 단연 튤립이었다. 
터키어로 튤립은 라레(lale)인데 이 말은 아랍어의 ‘알라’와 마찬가지로 신(神)을 가리킨다.

활짝 필 때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튤립은 신 앞에서 겸손을 지키는 고귀한 꽃이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 시절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튤립은 이미 야생화와는 형태와 색깔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꽃잎이 아주 길고 끝이 바늘처럼 뾰족한 형태로서 단검을 연상시키던 이런 꽃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찾기 힘들며, 
사람이 인위적으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과거에 크게 유행했던 이런 꽃들은 오늘날 다 사라져서 
단지 그림이나 도자기 문양에만 남아 있다.

:: 튤립 때문에 권좌에서 쫓겨난 왕
오스만제국 시대 중에서도 특히나 튤립이 큰 인기를 누리던 아흐메트 3세 시절은 ‘튤립시대(1718~1730)’라고 불린다.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던 이 시기는 궁정 사람들과 고관, 부유층 사람들이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별장에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음악·건축·시 등에서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던 호시절이었다. 
당시 술탄의 정원에서는 봄마다 장대한 튤립 축제가 열렸는데, 그 화려함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정원 주변에 거울을 둘러 세워 전시장이 두 배 이상 넓어보이도록 했다. 
각 품종의 이름은 은으로 만든 명패에 새겼다. 
튤립 4개마다 초를 하나씩 세워 불을 켰는데, 이 초의 높이도 꽃의 키와 일치하도록 만들었다. 
금박을 입힌 새장 안에서 새들이 노래를 불렀고, 커다란 거북 수백 마리가 등에 촛불을 지고 정원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게 함으로써 전시장을 환상적인 조명으로 장식했다.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튤립의 색깔을 돋보이게 
하고 조화를 이루는 색의 옷을 입도록 했다.”(마이클 폴란 ‘욕망하는 식물’, 152쪽) 
그렇지만 이건 조금 도가 지나친 게 아닐까?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높더라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는 옛 노래 그대로이다. 
엄청난 값을 치르며 페르시아와 네덜란드에서 수입하는 수백만 개의 튤립 구근 대금이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이 
되었고, 결국 튤립이 한 시대를 끝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1730년에 ‘반(反) 튤립 봉기’가 일어나서 아흐메트 3세는 
퇴위되었다.

술탄의 정원을 지키는 정원사(bostanji) 역시 이국적인 풍모가 넘쳐났다. 
이들은 튤립을 가꾸는 전문가 외에 호위병이자 짐꾼이자 경찰이자 사형집행인이었다. 
왜 지상천국을 지키는 이 사람들이 사형 집행까지 맡아서 하는지 이유는 아리송하지만, 하여튼 하얀 모슬린 바지에 
짧은 셔츠, 빨간색 테 없는 모자를 쓴 이 정원사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자루를 매달아 보스포루스해에 
던져버리는 일을 담담하게 집행했다. 그중에서도 고급 관리들의 사형 집행은 수석 정원사의 몫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일은 사형 선고를 받은 고관에게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질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사형수와 수석 정원사는 정원을 통과해서 톱카피궁 최남단 집어장(集魚場)까지 800미터 거리를 달리기 
시합을 한다.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달리는 이 경주에서 사형수가 정원사보다 빨리 도착하면 사형에서 추방형으로 
감면되지만, 정원사가 더 빨리 도착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처형되어 시신은 바다에 던져진다. 
1823년에 하지 살리흐 파샤라는 사람이 이 이상한 관례에 따라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바람장사(windhandel)’로 불렸던 
튤립 선물거래를 풍자한 그림.
:: 네덜란드인의 마음을 훔치다
유럽인들이 터키의 정원에서 처음 튤립을 보았을 때, 튤립은 이와 같은 이교적인 매력이 가득한 신비의 꽃이었다. 
튤립이라는 말은 터번(turban)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꽃 모양이 그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누가 처음 튤립을 유럽에 들여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16세기 중엽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 모습을 
드러냈고, 곧 여러 지역으로 퍼져갔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두어서 제2의 고향이 된 곳이 네덜란드였다. 
이 나라에 튤립이 전파된 데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의 저명한 식물학자인 클루시우스였다. 
그는 빈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식물학자로 활동하다가 1593년에 레이덴대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곳에 
식물원 건립을 주관했다. 이 대학의 상징처럼 된 식물원(Hortus academicus)은 전 세계의 식물 자원을 들여와서 
관찰하고 실험한 후 다시 여러 지역에 보급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발전했다. 클루시우스는 레이덴에 튤립 구근을 가지고 
와서 재배했는데, 여기에서 꽃이 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그 꽃들을 훔쳐갔다. 
오늘날 레이덴과 할렘 주변 지역에 봄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동산이 만들어지게 된 
먼 기원은 다름 아닌 클루시우스의 꽃 도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 네덜란드 사람들이 튤립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이 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원에서 꽃을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상징물인 나막신도 원래는 습기 많은 정원에서 일할 때 신는 덧신이다. 
구름 많이 끼는 축축한 날씨에다가 진창 투성이인 풍경을 접해 보면 집집마다 꽃을 가꾸어서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보려는 이 나라 국민들의 노력이 저절로 이해가 된다. 문제는 왜 네덜란드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7세기에 이 꽃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광적인 투기의 대상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 투기장이 된 꽃밭
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라면 급격한 경제 성장의 시대를 살아가던 당시 사람들의 심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빈민 출신 사람들이 단시간 내에 사회의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다. 
야콥 포펜은 아버지가 시장에서 생선을 통에 담는 미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자신은 거부가 되었고 
암스테르담 시장까지 역임했다.

심지어 바닝 콕이라는 사람은 유랑 걸인의 아들이었는데, 유럽 최고 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적으로 부가 크게 증가하고 사회적 유동성이 큰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 역전’의 꿈을 품게 
마련이다. 표면상으로는 종교적 자기억제와 합리적 관리를 내세우는 칼뱅의 교리가 지배적이었지만, 이면에는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 큰돈을 거머쥐어야 한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 튤립 광기 시대에 
유행했던 종자들.
처음에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된 꽃 재배가 한탕주의로 돌변한 데에는 
튤립이 지닌 몇 가지 특이한 요소도 작용했다. 
튤립을 많이 키우다 보면 100개 중 한두 개꼴로 특이한 무늬를 가진 꽃이 피어난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특별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물론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변종 가운데에서도 특히 강렬한 불꽃 무늬를 띤 꽃들은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합당한 이름도 얻었다. 
예컨대 역사상 최고의 튤립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튤립종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는 푸른색과 
흰색 바탕에 빨간 불꽃 무늬가 꽃잎 끝까지 뻗쳐 있었다.

이런 희한한 꽃일수록 심하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튤립은 종자에서 자라나서 꽃이 필 때 아주 심한 변이를 나타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어떤 꽃이 필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새로운 구근을 만들어내기까지 6~7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이 탐내는 멋있는 
꽃들을 얻기는 아주 힘들었다. 자연히 이런 꽃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15길더 하던 ‘아드미랄’이 175길더로, 
45길더 하던 ‘비자르덴’이 550길더 하는 식으로 꽃값은 계속 상승했다.

이왕 꽃을 재배하는 김에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발동해서 많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털어 텃밭 한 조각을 사가지고 
구근을 키웠다. 화훼산업이 완전히 투기로 변모한 것이다. 아직 꽃이 피어나기도 전인 땅속의 구근에 대해서도 매매가 
이루어졌다. 구매자는 미리 선금을 주고 나중에 피어날 꽃을 확보해 두었다가 실제 꽃이 피었을 때 훨씬 비싼 가격으로 
되팔아서 큰 이윤을 남겼다.

오늘날에는 선물거래라고 하는 이 현상을 당시에는 ‘바람장사(windhandel)’라고 불렀다. 
이 바람이 모진 광풍으로 커진 것은 1636년부터 그 다음해까지다. 
꽃값은 오르고 올라 급기야는 꽃 한 송이가 대저택 한 채 값이 될 지경이었다. 결혼 지참금 대신 비싼 튤립 구근 하나만 
달랑 들고 가는 일도 벌어졌는데, 그래서 이 품종의 이름은 ‘내 딸의 결혼식’으로 붙여졌다.

▲ 터키에서 유행했던 단검 모양의 튤립이 그려진 이즈니크 도자기.
:: 거품 붕괴하면서 날개 없는 추락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사람들은 이제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637년 초에 사람들은 꽃을 시장에 내다팔려고 했다. 그렇지만 팔려는 사람만 있지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오르던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격이 떨어졌다. 심지어 5000길더짜리가 50길더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막판에 ‘상투를 잡은’ 사람들이 큰 손해를 입게 된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버블이 터지고 한 바탕 광풍이 지나는 동안 네덜란드 사회는 적지 않은 충격을 겪었다. 꽃을 보는 시각도 사회마다 
또 시대마다 다르다. 한 인류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는 원체 아름다운 꽃에 대한 동경이 약해서 
종교 제의나 사회적 의례에서 꽃을 사용하지 않으며, 예술이나 종교에서 꽃의 이미지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먹을 게 충분하지 않아 꽃을 기를 여유가 없고 생태적으로도 아프리카 원산 꽃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권처럼 외래 문명과 접촉하면서 새삼 꽃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는 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꽃의 유행도 바뀐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늘 장미가 인기를 누렸는데,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화려한 장미가, 빅토리아 시대에는 다소곳한 장미가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한때 프랑스에서 히아신스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여(‘튤립 광기’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히아신스 열풍’을 일으켰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꽃의 아름다움이 때로는 황제의 절대 권력을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추악한 투기와 결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튤립은 그런 먼 역사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는 유치원 아이들이 가장 쉽게 그릴 수 있는 순수한 꽃이 되었다. 



   / 주경철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네덜란드사 전공). 
   현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문화로 읽는 세계사’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문명과 바다’ 등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