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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경의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4] 남자들이 말타기, 활쏘기, 씨름할 때 여자들이 유독 씨름판에 관심을 둔 까닭은?

바람아님 2015. 7. 26. 09:16

(출처-조선일보 2015.05.11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오은경의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4]  

남자들이 말타기, 활쏘기, 씨름할 때 여자들이 유독 씨름판에 관심을 둔 까닭은?  


씨름은 한민족 고유의 놀이일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튀르크 제 민족은 물론이고, 몽골을 비롯한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민속경기이다. 씨름은 인류사에서 그 어떤 형태의 스포츠보다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서 씨름이 시작된 것은 최소한 3500년 전부터였다고 한다.

특히 씨름은 남성들의 힘겨루기 형식으로 축제나 의식, 또는 결혼식이 벌어질 때 춤과 음악 못지않게 사람들 흥을 돋아주었던 고대인들의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다고 할 수 있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였던 헤로도토스는 고대 튀르크족의 관습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미 그때 튀르크족의 씨름 전통에 대해 기록한 바 있다. 
서기 10세기 중앙아시아의 저명한 의술가이자 사상가인 아비쎄나(980-1037)는 심신을 단련하는데 씨름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씨름으로 몸과 마음을 연마해 온 튀르크 남성들이 ‘하면 된다, 해야 한다, 
물러서지 않는다!’ 라는 강인한 정신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천 년 전에 등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중앙아시아 튀르크족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주인공 알퍼미쉬는 씨름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겨루기 시합’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또한 칭기즈칸 군대에서는 최고의 씨름꾼들을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로 
발탁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 의무적으로 씨름을 가르쳤다. 그래서 튀르크인들은 씨름을 ‘검은 호랑이’라고 불렀다.

칭기즈칸에 버금가는 튀르크의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1336~1406)는 병사들의 체력단련을 위해 매일 ‘검은 호랑이’를 
연습시켰다. 당시 오스만 왕조를 제압하고 영국,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티무르 군대는 무패를 자랑하는 최강 군대였고, 
그 시대 세계 영토의 절반을 정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주변국에 파견하는 외교사절단에 반드시 최고의 씨름꾼들을 포함했다.

사신들을 위한 접대나 피로연이 끝나면 씨름꾼들의 시범경기를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티무르 군대의 힘과 국력을 과시했다. 
그 결과 사신들이 협상을 타결하고,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튀르크족 민족 정보 포털 사이트 제공
/튀르크족 민족 정보 포털 사이트 제공
그래서 명성이 높고 힘센 씨름꾼들은 민중 속에서 전설이 되어왔다. 
튀르크족인 타타르 인들이 사는 크리미아 반도에는 전설적인 씨름 영웅들이 묻힌 묘지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곳은 지금도 많은 참배객이 찾는 성지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물 맑고 푸른 산골 잔디에서 씨름하며 남성들이 호연지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씨름을 국기(國技)로 삼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씨름꾼만 2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렇다면 씨름은 과연 남성들과 관련된 운동이었을까? 당연히 씨름은 남성들만의 스포츠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씨름의 기원은 여성들과 관계가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을 놓고 수컷들이 씨름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 
얼핏 힌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은가.

고대 튀르크 유목민들의 결혼풍습에는 모계사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남성들이 신랑감으로 선정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종목들은 말 타기, 활쏘기, 씨름이었다. 그것은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종목들이 후보자들의 자질과 육체적, 
정신적 능력, 그리고 인간적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잣대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신부 측이 가장 눈여겨보았던 것은 신랑의 육체적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씨름이었다. 
특히 씨름이 진행되는 동안 각 후보자가 보여주는 인내심, 용맹, 대담함, 자비심 같은 인간적 됨됨이라든가 우월한 체력은 
양질의 후손을 보장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족을 통솔할 수 있는 리더십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더 강력한 모계사회의 흔적은 신부와 신랑이 직접 씨름을 하였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신부가 신랑 후보와 씨름을 해 본 후 혼사 여부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 작가 엘리아누스(C. Aelianus: AD 175~235)는 중앙아시아 유목종족의 결혼풍습에 대해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혼을 희망하는 청년은 자기가 선망하는 신부 후보와 씨름을 해야 한다. 
만약 씨름에서 신부가 승자가 되면 패자인 청년은 그녀의 포로가 되어 평생 종살이를 해야 한다. 
씨름에서 신부를 이겨야 그 여성을 차지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튀르크족의 영웅 서사시 ‘알퍼미쉬’의 고대 판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남녀 간에 씨름을 한다니 엉뚱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물론 상상력에 맡길 문제이다. 
밤새도록 둘이 얼싸안고 씨름했는데 신랑후보자가 미래의 신부를 제대로 만족하게 해주지 못했다면 패자로 취급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을 것이다. 사내구실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말이다. 더더구나 모계사회가 아니었던가.

시간과 역사는 아버지중심 사회로 흘러갔고, 남성들은 다행히 굴욕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남녀 간의 씨름이라는 
통과의례는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신부를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의 고군분투는 다른 형태의 씨름으로 계속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