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7.29 정미경 소설가)
안중근·손기정·이광수가 큰 뜻 품고 찾았던 바이칼
혁명 실패한 러시아 청년이 '나눔' 실천했던 이르쿠츠크
시베리아의 여름은 짧건만 그 삶의 뜨거움 영원하리니
매미 소리만큼이나 여름이 깊다.
등불 아래의 사색보다는 쏟아지는 일광 아래로 달려나가 우주와 자연이 들려주는 지혜 속으로
풍덩 뛰어들기에 맞춤한 시간이다. 계절을 핑계 삼아 달려간 바이칼의 푸른 물색도 한창 깊었다.
희디흰 자작나무가 소실점까지 이어지는 숲을 지나자 호수가 나타났다.
바이칼 호의 깊이는 1700m 남짓이다. 잴 때마다 조금씩 더 깊어진다니 상상이 쉽지 않다.
건너편 산의 이마에 희끗한 잔설(殘雪)은 여기가 시베리아의 끄트머리임을 깨우쳐준다.
침엽수가 숲을 이루어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타이가의 여름은 안타깝도록 짧고 그래서 더 투명하게 빛났다.
언어의 무력함을 절감케 하는 풍경 속, 찡하니 맑은 공기와 끝없이 펼쳐진 야생화 꽃 무리 사이를 걷고 또 걷는데
애먼 머리만 묶었다 풀었다 하며 붙들고 있다 온 원고에 대한 상념을 밀치고 들어오는 생각의 자락이라니.
이 더할 나위 없는 뷰(View) 포인트마다 카페를 차리면 돈을 엄청 벌 텐데…. 차가운 맥주가 그립긴 했지만
과연 후기자본주의의 흙탕물 속을 헤엄치다 온 사람다운 내 영혼의 삭막함에 눈물이 다 났다.
호숫가 마을 '포르 드 바이칼(바이칼 항구)'은 이름 그대로 소박한 포구이자 남북으로 길게 드러누운 호수를 에두르느라 아래로 살짝 휘어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정차역이기도 하다. 이마에 크게 그려진 붉은 별 때문에 얼핏 장난감 모형처럼 보이지만
검은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한동안 호수를 옆구리에 끼고 달려가는 열차는 우리 근대사와도 얽힌 사연이 많다.
1909년, 하얼빈에 가기 위해 애 터지게 모은 독립 자금으로 기차표를 사 열차를 타고 이토 히로부미와 제 삶을 동시에
카운트다운해야 했던 서른한 살 안중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1936년,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향하던 손기정은
새벽녘 저 물빛을 보며 제 허벅지 근육을 새삼 쥐어 보았을까. 1933년, 역시 기차를 타고 와 이 포구에서 한동안 지냈고
이곳을 배경으로 소설 '유정(有情)'을 쓰기도 했던 이광수를 떠올려보는 마음은 안타깝다. 그가 도착한 늦여름, 이곳엔 벌써
가을이 깃들었을 터이다. 그는 찬 물결이 이는 포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쿄에서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한 일 때문에 상하이로 도피까지 했던 그는 어쩌다 친일(親日)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그가 조금 더 지평을 넓혀 가까운 이르쿠츠크를
찾아볼 기회가 있었다면 이후의 행적은 좀 달라졌을까.
이르쿠츠크엔 아름다운 영혼 투르페츠코이의 집이 여전히 남아 있다.
'12월의 사람들'이란 뜻의 '데카브리스트'로 불리던 귀족 청년 중 한 명이다. 매일 밤 화려한 무도회가 보장된 삶이 그의
것이었다. 1825년 12월, 일단의 러시아 청년 장교들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이어가는 농노제의 폐지를 내걸고 혁명을
모의한다. 혁명은 실패하고 그는 발목에 쇠사슬을 찬 채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역시 귀족 가문인 그의 아내는 '내 영혼을 가진 건 당신'이라 선언하며 황제가 내려준 이혼허가서를 벽난로에 집어던지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강제 노역을 마친 후에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자신들의 소유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며 여생을 보냈다.
그들이 전파한 문화와 건축은 이르쿠츠크를 '시베리아의 파리'로 변모케 했다.
그들이 살았던 작은 집에 걸려 있는 사진 속 얼굴이 몹시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호숫가를 스쳐간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제각각인가. 바이칼의 수심(水深)이 깊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보다 깊을까.
'여름이 우리에게 빌려준 시간은 너무 짧다'고 말했을 때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깨우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이란 유한하기만 한가.
어떤 생(生)은 그 삶이 껴안았던 뜨거움으로 타이가의 여름처럼 짧기만 한 생의 유한성을 훌쩍 초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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