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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경의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5) 남성들은 왜 자신의 누이나 어머니를 살해할까?

바람아님 2015. 7. 30. 17:32

(출처-조선일보 2015.05.21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터키의 국민작가 야샤르 케말(1923~2015)은 평생 여성, 노동자, 소수민족 등을 주제로 
사회적 약자 편에서 글을 썼다. 케말의 소설 중에는 혈연 간의 살인을 다룬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가 있다. 
반체제 혐의로 그가 수감되었을 때 알게 된 하산이라는 일곱 살 소년의 실화를 소설화한 작품이다.

소년의 어머니 에스메는 처녀 시절 소문난 미인이었다. 그녀는 마을 청년 압바스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난데없이 그녀를 짝사랑해오던 할릴이라는 청년이 나타나, 
그녀를 강제로 납치해 마약을 먹여 기절시킨 후 하루 밤을 보낸다. 
에스메는 하룻밤을 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풍습에 따라 억지 결혼을 하게 된다. 
에스메를 빼앗긴 압바스는 결국 할릴을 살해함으로써 사랑의 복수를 하지만, 그 역시 할릴의 가족에게 붙잡혀 살해당한다. 
할릴을 잃은 시댁 식구들은 며느리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졌다고 생각한다.

에스메는 분위기가 살벌한 시댁을 떠나려고 하지만 아들을 놔주지 않는 시댁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에 머문다. 
에스메가 사랑하는 어린 아들 하산은 친가 쪽 식구들에 의해 어머니는 부정한 여인이라고 끊임없이 세뇌당한다. 
아들은 이처럼 숨 막히는 집안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삼촌이 엄마를 죽이라고 선물한 총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엄마에게 총부리를 겨눠 살해한다. 명예살인을 한 것이다.
12살에 60살 노인에 팔려 결혼 후 5년 매질 끝에 도망친 17살 소녀에게 돌아온 것은 오빠의 명예살인./CNN 홈페이지 캡처
12살에 60살 노인에 팔려 결혼 후 5년 매질 끝에 도망친 17살 소녀에게 
돌아온 것은 오빠의 명예살인./CNN 홈페이지 캡처
전 세계적으로 1년에 약 5000여 명 정도가 이러한 폐습에 희생당하고 있다.서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가장 피해가 극심한 
나라는 파키스탄이다. 이러한 악습이 이슬람 전통 때문이라고 믿고 있지만 종교적 교리에서라기보다 구성원의 결속을 
중요시하는 부족주의 특성과 유목 전통 때문에 생겨났다.

명예살인의 희생자는 주로 가족 구성원 내의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성적으로 부정한 행위를 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믿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남자와 혼전 성관계를 했다고 짐작이 가는 신부, 아버지가 원하는 배우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한 딸, 이혼을 당하고 돌아온 딸, 바람난 아내 등이 그 대상이다. 심지어 대학 캠퍼스 커플 사이에서도 여자 
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이유로 살인해도 명예살인의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화 과정에서 혈연 및 친족 중심 체계가 붕괴하면서 명예살인의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근절되지는 
않고 있다.이것은 강한 부족주의 전통과 미약한 처벌에 기인한다. 가문의 명예가 걸려 있는 상황이 참작되면 가해자는 
6개월이나 1년 이내의 실형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 
터키의 경우는 최근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인권 가이드라인에 맞추기 위해 강력한 법 개정을 한 상태이지만 
다른 서남아시아 국가는 아직 문제의식도 공유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명예살인'을 규탄하는 파키스탄 여성./조선일보DB
'명예살인'을 규탄하는 
파키스탄 여성./조선일보DB
그렇다면 오빠가 친누이 동생을, 아들이 어머니를 죽여서까지 얻게 되는 가문의 명예란 무엇일까? 
도대체 왜 이런 폐습이 지속하는 것일까? 여자들은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부장적 질서체제 속으로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서남아시아 남성들의 대체적인 통념이다. 여성이 그 체제를 조금이라도 거부하거나 도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가부장질서의 존엄에 상처를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부한다.

그래서 여자의 일탈은 그 여자를 책임지는 남자가족 구성원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며,
‘불결한 상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명예살인이라는 방식으로 외과수술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들은 고집스럽게 믿고 있다. 
명예살인은 가부장적 남성 질서의 불완전성을 일시적으로 은폐해 주는 베일에 불과하다. 
남성 질서의 불완전성을 마치 정당한 법도처럼 이 같은 관습으로 해결하려는 짓은 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남성들의 
비열하고 비겁한 장치이다.

하지만 용어만 다를 뿐 명예살인이 남의 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중국과 한국에도 명예살인에 준하는 관습이 근대 이전까지 존재했다. 조선시대에서도 남편이 죽고 나면 아내에게 수절을 
종용하고 열녀문을 세워주는 방식으로 명예살인이 자행되어오지 않았던가. 단지 일탈에 대한 육체적 징벌의 정도가 
덜 잔인했을 뿐이지 그러한 여성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케말이 들춰냈던 명예살인이라는 극단적 가부장적 질서의 치부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틈에 IS처럼 다른 명분을 덧씌운 변종 바이러스로 다시 태어나 더욱 노골적이고 극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국제 사회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억울한 희생양이 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