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3.1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6> 포섭과 옹립
나무 팔아 착복, 지도 못 읽는 장군
군 부패·무능에 젊은 장교들 분노
6군단 소속 동기생들 3명 만나
"혁명" 입 떼자 "대찬성" 흔쾌히 동의
거사 38일 전 박정희, 29명 첫 대면
"죽음 같이하자" 굳은 악수하며 약속
작전반·행정반 통합조정 내가 맡아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해병대 훈련을 참관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오른쪽). 바로 뒤는 김종필 중정부장. 왼쪽은 의전비서관 조상호 중령. [중앙포토]
기회는 한 번뿐이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변질된 것이다. 오늘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과감하게 포착해야 한다. 그 무렵 김종필의 상념을 지배하던 언어였다.
꽃샘추위가 매서운 1961년 초봄 나는 분주해졌다. 박정희 소장과 대구에서 혁명 결의(2월 19일)를 한 뒤였다. 혁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출동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정군(整軍)운동은 육군본부 동료들로 충분했다. 이젠 혁명이다. 실병력이 있어야 했다. 그들을 이끄는 야전 장교를 포섭해야 했다. 나는 한강 이북, 박 소장은 한강 이남을 맡았다. <3월 9일자 참고>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열린 6·25 인천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가운데 사복 차림 선글라스)과 육사 8기 동기생 등 5·16 주역들이 모였다. 이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주로 포진해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오정근 중령(해병), 강상욱·오치성·이석제 대령. 뒷줄 왼쪽부터 옥창호·정세웅 대령(해병), 길재호 대령 , 김종필 부장, 유원식 준장 . [사진 오정근씨 아들 오명식 삼정KPMG 고문]
청계천과 무교동 사이에 조흥은행 본점이 있었다. 그 옆에 술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상수’라는 한글 간판을 달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상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수상’이다. 이곳은 동지를 끌어들일 때 만남의 장소로 자주 사용됐다. 일종의 아지트다.
우리는 상수를 ‘흐루시초프’라고 불렀다. 당시 소련의 ‘수상’인 흐루시초프의 직책을 거꾸로 읽은 것에서 착안했다. 그는 유엔 총회 무대에서 구두를 벗어 연단을 두들기며 서방사회를 비난하는 연설로 꽤나 유명했다. 전화로 서로 만날 곳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암호처럼 “오늘은 ‘흐루시초프’에서 보자”는 식이었다. 헌병대 감시망도 그곳엔 닿지 않았다.
‘흐루시초프’에서의 가장 큰 성과는 포천에 있는 6군단 포병단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부대는 5·16 때 제일 먼저 육본을 점령했다. 6군단 소속인 홍종철(군단 작전참모) 대령과 구자춘·신윤창(군단 포병단 대대장) 중령을 만났을 때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들은 모두 육사 8기 동기생들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입을 떼자마자 “혁명하자는 거지? 그래, 세상 뒤집고 바꾸는 거 찬성한다”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우리 다 생각이 같아”라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개 그런 분위기였다. 각 부대 지휘관들, 대대장이나 연대장들이 나오는데 많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내가 “이제 안 되겠다”고 하면 “이런 군대 갖고 안 된다” “나라를 방치할 수 없다” “염려하지 말라. 우리에게 임무가 주어지면 다 수행하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혁명동지의 규합이 쉬웠던 이유는 영관급 장교들이 너나없이 느끼는 군의 부패와 무능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스리쿼터(0.75t짜리 군용트럭)의 뒷바퀴를 빼고 바퀴축에 벨트를 연결한 뒤 여기에 기계톱을 매달아 산의 나무를 베어 파는 소위 ‘후생사업’이란 이름의 부패가 전군에 퍼져 있었다. 대부분의 장성이 부하들을 동원해 이런 짓을 해 사복을 채웠다. 축도 10만 분의 1 작전지도는 모눈 한 간이 10㎞다. 별 셋짜리 어떤 군단장은 독도법조차 몰라 지도의 두 지점을 손뼘으로 재고는 이 정도면 거리가 몇 ㎞냐고 물을 정도였다.
1962년 1월 1일 신년하례식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김 부장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착용을 권장한 재건복을 입고 있다. 가운데 뒷모습은 채명신 감찰위원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모임이 잦아지면서 4·19 1주기를 거사일로 잡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날 예상되는 학생 시위를 빌미로 거병(擧兵)하는 시나리오였다. 그럴수록 동지들 사이에선 “혁명 지도자로 누구를 옹립하려고 하느냐” “너 혼자 알고 있으면 되나. 우리와 연결시켜라”는 요구가 뜨거웠다. 나는 말을 아꼈다. 박정희 소장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나야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박 소장은 여전히 군 감시망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소장이 내가 포섭한 혁명주체들 앞에 존재를 드러낸 건 4월 7일이었다. 거사 예정일을 10여 일 앞둔 시점이었다. 육사 9기생인 강상욱 중령의 장인이 운영하고 있던 명동의 한 호텔 건물(양명빌딩) 옥상에 동지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박정희 소장을 모시고 올라갔다. 이들 중엔 박 소장을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로 파고들면서 “자, 모두 이곳을 보라. 이분이 우리를 이끌 분이다”고 소개했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만세” 소리도 여러 차례 나왔다.
박 소장은 극히 짧게 인사 겸 연설을 했다. 키워드는 구국(救國)과 살신(殺身), 기회였다. “구국의 순간이 왔다. 지금이 나라를 구할 절호의 기회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게 아니다.” 간결함이 박정희다웠다. 사실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 이심전심, 같은 뜻을 품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 아닌가. 행운의 여신은 한번의 기회만을 준다. 기회가 오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낚아채야 한다. 그 무렵 군심과 민심은 같았다. 사회안정과 변혁을 바라고 있었다. 군의 정치개입은 역사의 필연이 되고 있었다.
5·16 당시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
우리는 그 자리에서 혁명지도부를 구성했다. 총지휘자는 박정희 소장이다. 지도부를 작전반과 행정반으로 나누되 두 반을 통합 조정하는 임무는 내가 맡기로 했다. 작전은 출동부대를 이끌고 행정은 작전을 지원하는 업무였다.
작전반 책임자는 서울 일원의 방어를 맡고 있던 6관구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 연락책은 육군본부 오치성 대령으로 정했다. 행정반은 육본의 이석제 중령, 연락책 강상욱 중령으로 했다. 원주의 1군 사령부는 조창대 중령이 맡았다. 조직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면서 보안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4월 7일 이후의 모임은 반을 단위로 해서 소규모로 진행하기로 했다.
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m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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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경우=박정희를 지도자로 옹립한 4월 7일의 29명 핵심동지 모임에 해병대 출신은 없었다. 『김윤근 회고록』(해병대와 5·16, 1987년)에 따르면 김포에 주둔하는 해병 1여단에서는 부연대장 조남철 중령과 대대장 오정근 중령,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을 중심으로 해병대 단독 쿠데타가 추진됐다. 거사일을 61년 4월 15일로 잡아 구체적인 출동계획까지 마련했다. 1월에 여단장으로 취임한 김윤균 준장은 만주군관학교 6기생 출신이다. 만군 1기생인 김동하(1해병사령관) 예비역 소장과 2기인 박정희(2군 부사령관) 소장의 후배였다. 김윤근이 김동하 집에서 여단장 취임 축하 인사를 받는 자리에 박 소장이 대구에서 올라왔다. 김윤근은 박정희의 설득에 거사 합류를 약속한다. 김윤근은 4월 15일을 며칠 앞두고 조남철 중령 등으로부터 해병대 출동의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때 김윤근이 박정희의 거사계획을 알려주면서 ‘더 큰 혁명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 해병1여단은 5·16 때 한강 다리를 제일 먼저 돌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