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他/백선엽·김종필

"송 총장 당장 물러나십시오" … 그땐 내가 참 당돌했어 … 박정희 "자네 하려는 거, 그거 하자" 지프차서 언약

바람아님 2015. 7. 22. 09:58

[중앙일보] 입력 2015.03.1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 5·16 거사의 씨앗

박정희도 송요찬에게 공개편지
'3·15 부정선거 책임지고 용퇴'
송 총장 "정기있는 장교 있어 다행"
사퇴 받아들여 … 기득권 세력 반발
중령 군복 입고 장면 총리 찾아가
송원영 비서관 "여기가 어디라고"
'세상 뒤집는 혁명으로 전진' 결심
도서실서 책 빌려 이집트 혁명 연구

1961년 8월 진해 해군통제본부 공관에서 열린 군·정부 관계자 세미나에 참석한 김종필 중 정 부장(왼쪽 두 번째). 맨 왼쪽 선글라스 낀 사람이 송요찬 내각수반.

“지금 생각해도 참 당돌했어.” JP가 정군(整軍)에서 5·16에 이르는 긴박했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떠올린 말이다. 그 대담함은 박정희와 ‘지프의 혁명언약’으로 발전한다.


 4·19혁명 10주년, 나는 학생들의 의거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1970년 그때 나는 공화당 의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역류에 숨 막히고/분노가 꽃 피던 날/해일같이 넘쳐 온 함성들이/선지빛 산화(散華)로 흩날려/조국의 사월 청정한 넋돌되어 솟아난다….” 1960년 4·19 때 나는 서른네 살 육군 중령이었다. 나 역시 4·19 정신에 공감하고 있었다.

 4·19의 반독재, 반부패 외침은 장면 정부의 무능한 리더십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젊음의 희생은 우리나라를 결정적으로 바꿔낸 전환적 에너지였다. 군대 내부도 그런 물결이 꿈틀거렸다.

김종필, 장면 전 총리(왼쪽부터)

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이 실시되자 장교들은 집에 못 들어가고 영내 대기할 때가 많았다. 육본 정보참모본부 기획관리과장이었던 나의 사무실은 영관급 장교들의 ‘시국 토론장’이 됐다. 중견 장교들의 논의는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군 수뇌부들이 퇴진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5·16 거사까지 1년 새 육군 참모총장 4명이 바뀌고 10여 명의 장성이 퇴진한 정군운동은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정군운동의 주동자는 나를 비롯해 석정선(훗날 정보부 차장보), 김형욱(중앙정보부장), 길재호(공화당 사무총장) 등 육사 8기 동기생 8명이었다.

 우리들의 정군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는 당시 부산지구 계엄사령관(군수기지사령관)이었다. 5월 2일, 박 장군은 부관인 손영길 대위(육사 11기)를 L-19 경비행기로 서울로 보내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다음은 박정희 소장의 편지 요지. “군의 최고 명령권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시어 정화(淨化)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자진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라고 적었다. 박 소장은 우리와 일절 상의하지 않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 송 총장의 반응은 격렬했다. “내가 박정희를 얼마만큼 보호해줬는데.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네가 나를 잡아먹어?”라고 반응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송 총장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송 총장은 이미 나한테 약점이 잡혀 있었다. 3·15 부정선거 직후 그는 “군은 이번 선거에서 맡은 바 110%의 성과를 냈다”고 열변을 토했다. 나는 그때 회의의 주무과장으로 앉아 있었기에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110%라면 60만 군인의 최소한 10%를 엉터리로 투표하게 했다는 것 아닌가.

 나는 박 소장의 편지 소식을 듣고 ‘정군 연판장’을 작성했다. 연판장은 “우리 군은 4·19정신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정군 대상자는 3·15 부정선거를 지휘한 책임자, 부정축재자, 부패와 무능 지휘관으로 한다. 정군은 개인적 권고로 군을 떠나게 하며 사퇴권고에 불응한 때에는 지휘계통을 통해 사퇴를 종용한다”는 내용이다. 일차적으로 송 총장을 겨냥했다. 연판장은 허정 과도정부의 이종찬 국방장관에게 전달되기 하루 전 탄로났다. 정군파 8명 중 나와 석정선 등 5명이 방첩대에 구속됐다. 혐의는 국가반란음모죄. 범죄 혐의는 사형까지 가능한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민심과 군심이 우리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송 총장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나를 불렀다.

1959년 서울 영등포 육군 6관구사령관 사무실에서 박정희 소장이 미군 관계자와 환담하고 있다. 이듬해 1월 박 소장은 군수기지사령관에 임명돼 부산으로 내려간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송 총장=“나를 왜 물러나라고 하는 건가?”

 ▶나=“3·15 부정선거를 청산하고 나라가 큰 전환을 이루려고 하는데 총장님께서 하나도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입니까. 책임지고 물러나십시오. 우리도 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을 받겠습니다.”

 ▶송 총장=“난들 격동하는 상황에서 생각이 왜 없겠나. 우리 군대에도 귀관과 같은 정기(精氣)를 간직한 중견 장교들이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내게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나=“안 됩니다. 오늘 저녁에 결심해주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결심이 물러집니다”라며 몰아붙였다.

 송 총장은 나를 설득하러 불렀다가 오히려 압박을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당돌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데 이런 당돌함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런 일을 하라고 한다면 과연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령이 육군 총수를 향해 하루의 유예도 주지 않고 군을 떠나라고 압박했으니 말이다. 나의 방식과 발상은 하극상으로 단죄될 수 있었다. 송 총장은 결국 참모총장직을 관두겠다고 답했다. 연병장에서 나를 기다리던 육사 동기생 30여 명은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때가 5월 19일 저녁이었고 송 총장은 이튿날 사표를 제출했다. 박정희 소장이 불을 붙인 지 17일 만에 내가 ‘송요찬 퇴진’을 마무리한 것이다. 정군운동의 기세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군의 기득권을 허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60년 6월 9일의 일이 떠오른다. 그날 이종찬 국방장관이 소집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도 참석했다. 회의에서 박 소장은 “과도정부하에서 군 내부의 정치세력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자정(自淨)없이 신정권으로 넘어가면 정치의 시녀가 될 수 있다. 소장 이상의 장성들에 대해 숙정(肅正)을 단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박 소장의 숙정 주장은 소수의 목소리에 그쳤다.

 지휘관 회의를 마친 박정희 소장은 정보국의 내 사무실에 들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박정희 소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저녁에 뭘 하나?”라고 물었다. 내가 “별일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럼,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박 소장의 서울 집은 신당동이었다.

 박 장군은 자기 지프의 선탑석인 운전병 옆에 앉지 않고 굳이 뒷자석 내 옆자리에 올라탔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는 “자네, 지금 준비하는 거 본격화하자”고 말했다. 내가 “뭘 말입니까?”라고 묻자 박 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가 하려고 하는 거, 그거 하자고!”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금세 깨달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앞의 운전병에게 들리지 않게 나는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면 혁명을 해야지요.” 박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개혁하는 정군운동을 벌이되 반발이 심하면 혁명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박 장군과 나의 마음에 ‘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나와 그가 혁명이란 말을 나눈 최초의 대화였다. 그 순간 우리는 혁명가의 운명을 지니게 됐다. 60년 6월 9일 ‘혁명의 언약’은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61년 2월 내가 군에서 쫓겨난 뒤 ‘혁명의 결의’로 구체화되었다. 이 같은 결의는 수천년 가난을 극복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원대한 목표로 연결되었다. 지프의 언약 뒤 나는 육본 정보참모부에 설치된 도서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터키의 케말 파샤 혁명, 심지어 영국의 산업혁명까지 연구했다. 특히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혁명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혁신과 반동의 대립이 격심한 20세기 후반기에 나세르가 지향했던 지도적 자세는 세계사적 의의를 뚜렷이 금 긋고 있었다.

 그 무렵 내 가슴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군은 참모총장이 이끌어야 했고 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이 밀어줘야 했다. 결국 문제는 정부의 인사였다. 그해 8월 21일, 나는 장면 총리를 만나러 갔다. 제2공화국은 내각제다. 국무총리가 최고 실권자다. 총리가 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중령 군복을 입고 중앙청(1995년 철거)의 총리실로 들어가는데 송원영 공보비서관이 가로막았다. 안쪽에서 고함소리가 새어 나왔다. 민주당 구파인 유진산 의원 등이 신파인 장면 총리와 조각(組閣) 협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송 비서관한테 “나라가 새로 출발하려 하는데 국군도 재정비해야 한다. 그러자면 정군을 해야 하는데 국방부 장관부터 신뢰받고 군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임명돼야 한다. 이런 건의를 드리려 왔으니 장 총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당신이 그 정군운동의 주동자요? 여보쇼, 여기가 어디라고 군복을 입고 들어오시나. 보시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내일 아침 명륜동 총리 댁으로 오라”고 말했다.

 이튿날 총리 집으로 사복을 입고 갔다. 현관에 신발이 수십 켤레가 있었다. 그 시대의 안방정치 풍경이다. 송 비서관은 “지금은 당최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이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고 총리께서 곧 성당 미사를 가야 하니 오늘도 만나기 어렵겠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송 비서관은 나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와 “총리께 당신의 뜻을 다 전달했다”고 했다. 뒤이어 발표된 군 수뇌부 인사에서 정군의 의지는 희미했다.


 JP에게 1960년은 정군에 매진했던 한 해였다. 육군 참모총장 등 적지 않은 군 수뇌부가 정군운동으로 물러났으나 근본적으로 정치가 문제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중앙일보 창간 50년 기획] 김종필 증언론 '소이부답' 더보기

● 인물 소사전 송요찬(1918~80)=1960년 4·19 당시 계엄사령관. 이후 3·15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낸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61년 5·16이 나자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군사정부에서 국방장관, 내각수반 겸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62년 6월 물러났다. 63년 8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해 구속됐다. 70년 인천제철 사장, 80년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


● 인물 소사전 송원영(1928~95)=제2공화국 시절 장면 국무총리의 공보비서관. 경향신문 기자 출신. 1963년 야당인 국민의당 대변인을 맡았다. 신민당 소속으로 7~10대 서울 동대문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신민당 대변인과 원내총무를 지냈다. 80년 정치활동이 금지됐다가 85년 신한민주당 후보로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를 재개했다. 88년 정계에서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