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코노미 2015.04.20
렘브란트는 젊었을 때, 시쳇말로 ‘잘나갔다’. 제분업을 하던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났고, 부모님도 좋은 분들이었다. 라틴어를 배웠고, 대학도 다녔다. 아주 젊은 나이에 독자적으로 공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20대 중후반에 도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28세의 나이에는 22세의 사스키아와 결혼도 했다. 집안도 좋은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여자가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갖고 시집을 왔다. 오늘날로 얘기하자면, 방앗간집 아들이 시장 딸과 결혼하면서 신분 상승을 하게 된 셈!
이처럼 젊은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린 렘브란트는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렘브란트는 살아생전 암스테르담은 물론 유럽 최고의 작가로 군림했으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고 오만방자했을까. 그러나 세속적인 부와 성공을 거머쥔 렘브란트는 명성의 크기만큼이나 절망과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렘브란트는 첫아들을 얻은 후 바로 잃었다. 이어서 둘째 아이가 세례 받은 지 3주 만에 사망했다. 셋째 딸아이는 태어난 지 2주 후에 사망했다. 뒤이어 어머니가 사망했다. 렘브란트가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하던 시절, ‘도살된 소(1643년경)’라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도살된 소가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림이다. 살아 있다는 건 마치 도살된 소처럼 비참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목욕하는 밧세바’, 1606년, 루브르 박물관.
렘브란트의 녹록지 않은 인생에는 세 여자가 있었지만, 누구도 첫 부인 사스키아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렘브란트는 티투스의 유모로 들인 여자 게르티와 동거했지만 소송을 걸어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모는 등 아주 치사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결별했다. 그다음엔 헌신적인 하녀였던 한참 연하의 헨드리케와 동거했지만 혼인하지는 않았다. 재혼하면 유산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헨드리케에 대한 애정은 지극해 그녀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녀 역시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슬픈 가족사를 등에 진 렘브란트는 여러 차례 파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그는 결코 가난과 싸워야 했던 화가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은 그에게 주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돈 관리에 실패하고 씀씀이가 커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 결국 파산해 집에서 쫓겨나고 빚을 갚기 위해 부인의 묏자리까지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파산의 중요한 이유는 그의 무지막지한 취미생활(사실 취미생활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고,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투자’였다고 보는 게 옳다) 때문이었다. 렘브란트는 엄청난 수집광이었는데, 특히 골동품과 그림을 사 모았다. 좋은 그림이 나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구입했다. 그림뿐 아니라 마음에 드는 오만 가지 물건은 뭐든지 사서 집 안에 끌어들였다. 이런 수집벽 때문에 가산을 어마어마하게 탕진했고, 급기야 몇 차례 파산을 겪어야 했다.
파산 선고로 인해 집과 소장품이 경매에 붙여지던 해인 1658년, 렘브란트는 한 점의 자화상을 제작했다. 곧 경매로 팔릴 화려한 의상 하나를 차려 입고 마지막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어 있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서려 있다. 왼손에 지팡이를 쥔 채 신중하고 차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고독과 파멸 속에서도 여전히 자기 확신과 자긍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얼굴 표정과는 사뭇 대조되는 수수께끼 같은 의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제적으로는 파산 상태였지만, 자신의 힘은 파괴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일까. 자신에겐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화가로서의 자기 자신은 결코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돌아온 탕자’, 1659~1669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죽기 전까지 그린 미완의 그림으로 참회하는 심정이 담겨 있다.
그림 속 아들의 발과 신발은 그가 얼마나 곤궁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느라 거북이 등가죽처럼 말라갔고 눈은 거의 실명 상태다. 렘브란트는 아들을 태아처럼 민머리로 만들어 아버지의 배에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다. 아들의 등을 만지는 아비의 손은 마치 신의 손길처럼 무중력 상태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모습은 어머니의 모습과 중첩돼 있다. 가만히 보니, 오른손은 남자의 손이고 왼손은 여성의 손이다. 아버지의 관대함과 너그러움, 어머니의 자애로움과 따스함으로 돌아온 탕자를 환대하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는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지만, 실제로는 렘브란트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이자 고백이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렘브란트의 화려했던 삶,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재산까지 모두 탕진한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회한을 그린 것이다. 렘브란트가 대단해 보이는 지점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패배를 아주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아버지, 남편, 혹은 동료로서 그의 삶은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그의 자긍심은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사실 렘브란트는 그다지 좋은 성격이 아니었고 타협할 줄 몰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성격이 예술에는 도움이 됐다. 렘브란트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선한지 악한지, 혹은 심술궂은지 인내심이 많은지, 욕심이 많은지 관대한지 절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부족하지만 예술가로서는 위대한 자질일지도 모른다. 그림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 그래서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그저 그림을 위한 하나의 눈과 하나의 손이 되는 길이었다.
개인사만 보면 실패했을지 모르나 예술가로서는 성공한 삶을 살았던 렘브란트. 그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비전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가정사든 직업이든 어떤 방면에서도 실패를 두려워한다. 실패를 하면 본인뿐 아니라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배웠다. 사실은 실패 그 자체보다는 책망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법은 무엇일까. 렘브란트처럼 실패 선언, 파산 선언, 즉 당당하게 선언을 해야 비로소 실패가 끝난다. 불운의 문이 닫히고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애가 아닐까.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단지 이것을 감수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렘브란트야말로 이 운명론이 창조적인 것과 합치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위대한 화가가 아니었을지.
[게시자추가-램브란트의 마지막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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