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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원했던 배우자와 살고 계십니까…조각가의 간절한 사랑이 낳은 기적

바람아님 2015. 7. 25. 00:24

매경이코노미 2015.05.04

 

당신은 매일 밤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존재가 문득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새로운 상대와의 로맨틱한 연애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선택한 사랑에 실망하고 있는 중인가? 그런 자신을 처절하게 돌아보도록 만드는 신화가 있다. 바로 피그말리온!

피그말리온은 노총각이었다. 게다가 직업은 조각가였다. 그의 소망은 여자 없는 세상에 사는 것이었다. 설마? 어쩌면 여성에게 상처받은 남자들에게 가끔씩 듣게 되는 엄살과 푸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그는 여자를 싫어했다기보다 두려워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피그말리온은 왜 여성을 혐오 혹은 두려워하게 된 것일까?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피그말리온이 너무 어린 소녀들이 몹쓸 짓 하는 것을 보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수치스러운 줄 모르고 악행에 물들어 있는 여인들을 자주 목격하곤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여인들을 침실로 끌어들이지 않았고, 급기야 혼자 살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여자가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은 대신 놀랄 만한 솜씨로 하얀 상아로 된 여인을 만들었다. 적당한 크기의 봉곳한 가슴에, 탐스러운 엉덩이 등 자기가 가장 선호하는 모양 그대로. 그렇게 공들여 탄생한 조각은 깜짝 놀랄 만큼 현실의 여인과 똑같았다. 그 스스로도 그것이 진짜 사람 살갗인 줄 착각하고 만져보기 일쑤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만든 완벽한 조각에 매료됐고, 사랑에 빠졌다.

피그말리온은 매일매일 그녀를 만지고 키스하고 껴안았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조약돌, 조개껍질, 백합 같은 아름다운 꽃, 보석, 애완용 새를 선물하며 그녀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다. 옷을 입히고 귀걸이와 목걸이로 장식했으며 심지어 약혼한 것처럼 손가락에 반지까지 끼워줬다. 그리고 자줏빛 침대로 데려가 머리맡에 부드러운 베개를 놓아주고 ‘사랑하는 이여, 내 사랑’이라고 불렀다. 피그말리온은 실재와 환상을 넘나들며 묘한 사랑의 감정을 즐겼다. 비록 사랑의 대상이 조각이라는 것이 다소 불만이었으나 그래도 조각을 향한 그의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랑은 애초부터 현실 속 대상을 배제한 것이어서 늘 갈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터였다. 피그말리온은 입술이 바짝 마르도록 온전한 사랑을 열망했다. 고민 끝에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신인 비너스의 축제 때 제물을 바치며 그녀를 살아 숨 쉬는 여성으로 전환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오, 신이시여! 제가 만든 눈부시게 빛나는 조각을 제 아내로 변신시켜 주소서!”

집에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처녀가 누워 있는 침대에 슬며시 들어갔다. 살며시 입을 맞추니 마치 촛농이 만져지듯 상아 조각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비너스가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그는 여자에게 ‘우윳빛 처녀’라는 뜻의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리고 갈라테아는 파포스란 이름의 첫딸을 낳았다.

 


 

 


19세기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인 장 레옹 제롬과 영국 라파엘전파의 에드워드 번 존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를 그렸다. 특히 앵그르의 영향을 받아 관능적인 여성과 드라마틱한 장면을 잘 그렸던 제롬이 그린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는 어찌나 아름답고 실감 나는지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그림 속에서는 큐피드가 막 화살을 쏘려 활시위를 당기고 있고, 등을 돌린 갈라테아는 허리를 굽혀 피그말리온과 키스하고 있다. 우유 빛깔의 그리스 조각 같은 몸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여인이 여성혐오자인 피그말리온의 여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쟁취했다고 느낀 순간,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림 속 배경의 가면과 방패가 이들의 예사롭지 않은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다. 뭉크의 ‘절규’처럼 비명을 지르는 두 가면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메두사의 잘린 머리가 새겨졌을지도 모르는 가로놓인 방패는 무슨 뜻인가?

사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는 피그말리온의 사랑이 성취된 이야기까지만 나온다. 흔히 말하는 해피엔딩인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미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지젝은 “다시 말해 해피엔딩이야말로 그 어떤 결말보다도 절망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 속 두 개의 도상은 두 사람의 사랑의 결말에 관해 토로하는 상징물이다. 그러니까 환상 속의 그녀인 갈라테아는 인간이 됐고, 인간 갈라테아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갔으며, 그만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 보통 사람들처럼 희로애락애오욕의 현실이라는 재앙을 만났고, 환멸을 통과해야만 했을 것이다.

삶은 매순간 선택이고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러 내야만 한다. 앙드레 지드처럼 사랑하는 사촌 누이동생과 결혼하고도 그녀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잠자리를 피함으로써 평생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A. 카뮈에 따르면 지드는 육체가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그 욕망이 더욱 예민해지는 것을 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 남자들은 욕망의 충족을 지연시키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환상을 지키며 살지 못하면서도, 상대방 여자에게는 환상을 지켜줄 것을 내심 요구한다.

당신은 어떤 여자와 살고 있는가? 어쩌면 당신은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이 만든 환상 속의 그녀였던(과거형) 여자와 살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한때 온몸과 영혼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는 이미 당신이 사랑했던 그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마치 ‘카산드라(예언의 능력을 가졌으나 아무도 그녀의 예지를 믿지 않는 운명을 가진 트로이의 여인)’처럼 악을 쓰는 여인으로 변신해 있을지도 모른다.

로맨틱 코미디에 속하는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라는 희곡에서 주인공 히긴스가 피커링 대령에게 말한다.

“여자는 자신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고, 남자는 또 자기 방식대로 살기를 원해요. 각자 상대방을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지요. 한 사람은 북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남쪽으로 가려고 하거든요. 결국은 둘 다 전혀 다른 방향인 ‘동쪽’으로 가게 되죠. 둘 다 동풍을 싫어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전 확실한 독신으로 있는 거예요. 또 그렇게 남아 있고 싶고요.”

허례허식으로 가득 찬 상류사회를 경멸했던 히긴스는 남성과 여성은 각각 다른 개성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기 때문에 결혼이 서로의 삶을 더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고 일갈했다.

그렇지만 결혼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할 것인가?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파생된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의 본뜻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는 것이 어떨까! 피그말리온은 다른 사람에 대해 기대하거나 예측하는 바가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뭔가를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그것이 기적처럼 이뤄진다는 것! 어쩌면 당신에게 남은 것은 새로운 최면을 거는 일이다. 다시 건강한 환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사실 모든 사랑의 출발은 자기 사랑이다. 피그말리온이 만든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인간 사랑의 근원은 바로 나르시시즘, 즉 자기애다. 인간의 자식 사랑이야말로 나르시시즘과 피그말리온 신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그러니 새로운 최면이란, ‘너는 나’라는 암시다. 내 환상이었던 그녀가 결국 나였다니, 어찌 사랑해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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