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2015.05.18
‘아버지의 초상’, 1925년, 달리.
19세기 말 20세기 초반, 근대 화가들은 아버지와의 반목과 갈등이 유독 심했다. 그들은 부모가 바라는 직업을 갖지도, 부모가 원하던 여자와 결혼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예술가의 부모는 은행가, 상인, 법률가 등 중산층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자식들이 자기들처럼 법률가나 사업가가 되기를 소망했다. 더불어 여염집 규수와 결혼해 순탄한 부부생활을 하기 바랐다. 그러니 당대에 화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삶을 거부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화가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저항했다. 그러나 화가들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은 대부분 심약하고 조심스럽게 드러났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소심한 마음이 저지르는 역동적 감정의 세계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왜 아버지에게 그토록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졌을까? 늘 그렇듯 아버지 세대는 아들 세대를 나약하고 의존적이라고 생각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아들이 아버지 마음에 들기는 아주 어렵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범접할 수 없는 큰 존재거나,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도전의 과제다. 혹은 ‘어머니’라는 여자를 두고 벌이는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 속의 라이벌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근대 화가들은 자기가 하고픈 예술을 하기 위해 능력 있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피하는 쪽으로 가는 경향이 많았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현대미술의 태동으로서의 세잔이라는 작가의 탄생은 은행가인 아버지의 경제력 덕분에 가능한 결과였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돈이 세잔으로 하여금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실험을 지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세잔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서도 그 사실을 오래도록 숨겼다. 아버지가 눈치채고 생활비를 대폭 줄이면서 압박을 가하는 와중에도 끝내 함구했다. 이렇듯 세잔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고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덕분에 성취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입체파의 효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세잔이 아버지와 날 선 대립을 하지 않으면서 돈줄을 쥔 아버지와의 갈등을 피해갔다면, 반 고흐와 달리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첨예하게 대립시키고 이것을 시각화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독일 개혁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상당히 나빴고 말년에는 결별한 채 살았다.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와의 종교적 갈등이었고, 다른 이유는 여자 문제였다. 설교는 잘 못하지만 선한 목사였던 아버지는, 신학교에 입학조차 못하고 전도사가 되겠다며 벨기에 탄광촌에 갔지만 교단에서 파면당한 아들에게 크게 실망한다. 그는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일삼는 반 고흐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까지 했다. 더욱 못마땅해했던 것은 여자 문제다. 사촌 여동생, 정혼한 여자 등 사랑해선 안 될 여자를 사랑하거나 아프고 불행한 창녀처럼 자신이 돌봐줘야만 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한심과 근심을 오가며 낙담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심장 발작으로 죽자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들 때문이라며 반 고흐를 비난했다.
‘성서가 있는 정물’, 1885년, 반 고흐.
큰 충격과 상실감에 빠진 당시 반 고흐의 심경을 보여주는 작품이 ‘성서가 있는 정물(1885년)’이다. 이 그림에서 성서는 탁자의 한가운데에 크고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에는 성서에 짓눌린 듯 비스듬히 에밀 졸라의 ‘생의 기쁨’이라는 책이 작고 불안정하게 놓여 있다. 성서는 아버지를, 소설책은 자신을, 불 꺼진 초는 아버지의 죽음을 암시한다.
성서에는 이사야서(ISAIE) 1장 2~3절의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거역을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야훼의 말씀이 적혀 있다. 바로 반 고흐에 대한 아버지의 탄식이다.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지도 않는 등 아들이 타락한 이유를 프랑스 소설을 지나치게 많이 읽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독서광이었던 아들은 때로는 소설이 성서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고 아버지에게 대꾸하곤 했다. 이 그림이야말로 아버지가 원하는 자식이 되지 못했던 아들이, 자기보다 큰 존재인 아버지에 대해 갖는 자괴감과 죄의식의 심리를 표현한 사부곡이 아닐까.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만큼 아버지를 많이 그린 화가는 없을 것이다. 공증인이었던 달리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로 권위적이며 문화와 파티를 좋아하는 호사가였다. 달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돈을 펑펑 쓰면서 아버지와 아버지로 대변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망나니짓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하다. 예컨대 미술사 과목의 답안 제출을 거부하는 등 파행적인 행동으로 정학 처분을 당했는가 하면, 반정부 활동 혐의로 감옥생활을 하다 결국 퇴학을 당했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아버지 보란 듯이 남의 여자를 가로채면서 더욱 파국으로 치닫는다. 달리는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인 10살 연상 갈라와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아들이 친구의 부인을 가로채는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다며 격분해 먹다 만 성게 껍데기를 보낸다. 그때 달리는 아버지가 보낸 성게 껍데기를 깎아 자신의 머리카락과 섞어 흙 속에 묻으면서 아버지는 ‘평생 정신적 족쇄였다’며 절연 선언을 한다.
아버지에 대한 달리의 존경과 두려움의 심경은 그의 젊은 시절 작품 속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라네 해변에서의 화가의 아버지(1920년)’와 ‘아버지의 초상(1925년)’과 같은 작품들 속 아버지를 보라. 달리가 아버지를 그린 모든 그림의 공통적인 특징은 아버지가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압도적인 크기로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달리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자기를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는 권위와 힘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게다가 어떤 작품 속의 아버지는 옆모습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옆모습은 어떤 대상이 전면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존재일 경우에 그려진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달리 또한 아버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어찌해볼 도리 없는 막강하고 거대하며 미스터리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달리는 아버지 초상화를 통해 권위적이고 위압적이며 명령하는 아버지, 즉 강제와 억압의 표상으로서의 ‘큰(거대한) 아버지(great father)’를 그린 것이다.
이처럼 달리는 아버지를 그리는 행위로써 그를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유아적인 퇴행에서나 나올 법한 기이한 행동들은 달리가 아버지의 명령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을까.
혹시 당신은 5월이 유난히 부담스럽다고 느끼는가? 혹 그 이유가 아버지와의 불편한 마음 또는 해소되지 않은 갈등 때문은 아닌가? 당신은 아버지를 인정 혹은 이해하는가? 오늘 그저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를 찬찬히 생각해보라. 아버지의 아버지는 또 어떤 분이셨는가? 모든 아버지들은 어떤 부모의 아들인 동시에 시대가 낳은 아들이다. 아버지가 어떤 부모를 뒀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를 무작정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오늘만큼은 나와 관계된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고,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를 타자화시켜 놓고 보자. 처연할 정도로 고독한 한 남자의 내면을 넌지시 응시해 보자. 이 계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차고 싱그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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