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3.2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0> 역사상 가장 긴 하루
30예비사단서 거병 계획 새나가
장도영 "반란군을 체포하라" 명령
한강 인도교서 헌병, 궐기군에 발포
해병 병력, 응사하며 저지선 돌파
난, 광명인쇄소서 혁명공약 준비
경찰관 두 명 다가와 가슴 졸여
창경원 앞 6군단 포병단 트럭 행렬
인쇄소 2층서 보고 "휴~ 이제 됐다"
5월 20일 청와대 본관에서 윤보선 대통령을 면담하고 나오는 박정희 소장(오른쪽 둘째)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중장·왼쪽). 박 소장이 윤 대통령을 만나러 들어갈 때 벗어놨던 권총을 박종규 경호대장(오른쪽)이 들고 있다. 장 총장 오른쪽은 참모총장 비서실장인 안용학 대령이다. [중앙포토]
길을 나서는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거사 비밀이 누설됐기 때문이다. 집을 감시하던 방첩대(CIC) 요원들이 차량 두 대로 우리를 미행했다. 박 소장에게 급보가 들어온 건 오후 8시쯤부터였다. “거사 기밀이 샜다” “무장 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를 차단하고 있다. 궐기군 장교들을 포위하려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6관구의 김재춘 대령과 6관구 부근에 나가 있는 동지들의 전화는 긴박감과 걱정으로 차 있었다. 박 소장은 옆에 있던 우리에게 “오늘 저녁 일이 탄로 났다는구먼”라고 했다. 다소 놀란 그의 표정은 금방 단호함으로 바뀌었다.
누설의 진원지는 30예비사단이었다. 거사 참여자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상국 사단장에게 밀고가 들어갔다. 거병 책임자인 이백일(중령) 작전참모는 인근 야산으로 도피했다. 이상국은 이철희(준장) 방첩대장, 장도영(중장) 참모총장에게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장도영은 육본 헌병대에 “6관구의 반란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상황 파악 때문에 출발은 지연되고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주요 임무는 혁명공약문의 인쇄와 라디오방송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밀어붙이셔야 합니다.”
5·16 거사 뒤 서울 중앙청(1995년 철거)을 지키고 있는 30예비사단 병력. [사진 국가기록원]
우리는 신당동 집을 떠났다. 자정 직전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나는 내렸다. 박 소장에게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안국동에 있는 광명인쇄소로 달려갔다. 이학수 사장은 인쇄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만약 일이 잘못돼 붙들려 갈 경우 당신들은 내가 총으로 위협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고 진술하시라. 대신 아침 6시까지만 묵비권을 행사해 달라.”
인쇄기가 돌아가는 ‘쩔그럭 ’ 소리가 왜 그렇게 큰지 가슴을 졸였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감시했다. 새벽 2시쯤이었다. 경찰관 두 명이 순찰을 돌다가 인쇄소 문 앞에 섰다. ‘수상한데 들어가 볼까’하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이 안으로 들어오면 감금을 하든지 총을 쏠 수밖에 없다. 제발 들어오지 마라’고 간절히 빌었다. 둘은 공장 문에 한동안 귀를 대고 듣더니 “야간작업이겠지”라며 그냥 지나갔다. 그들이 고마웠다.
새벽 3시쯤. 원남동의 창경원 앞길에 40여 대 트럭이 쾅쾅거리며 지나갔다.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어둠을 대낮처럼 밝혔다. 포천에서 출발한 6군단 포병단이 예정대로 진입한 것이다. 삼각지 육군본부를 진주하기 위해 내려온 혁명군이다. 인쇄소 2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휴~ 이제 됐다”고 했다. 걱정과 긴장감이 잠시 풀렸다.
6군단 포병단은 방첩대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았다. 문재준 포병단장과 홍종철 6군단 작전참모, 신윤창·구자춘 대대장이 1300명 장병을 이끌었다. 포병단은 트럭에 대포를 달았다. 그 부대 출동에는 미군의 의정부 검문소 통과가 가장 큰 문제였다. 사전 작전회의 때 나는 신윤창 중령에게 “절대 미군을 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검문소 미군은 7~8명 정도. 그들이 통과를 거부하면 그냥 몸으로 껴안아 서울까지 데려오라고 얘기했다. 신 중령은 “미군이 발포를 하면 어떻게 하나”고 물었다. 나는 “그래도 응사하지 말라. 우리 쪽 희생자가 나더라도 맨손으로 대응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소장은 “잘했다. 우리의 혁명은 무혈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때 검문소 미군과의 다툼이 없었다. 신 중령에 따르면 미군 위병은 “헤이 헤이, 훈련 잘하라”고 웃으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미군은 포사격 훈련을 가는 줄 알고 의심 없이 통과시킨 것이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5월 16일 새벽 3시 군서 무혈 쿠데타’ 소식을 머리기사로 전한 같은 날짜 경향신문(석간) 1면.
해병대는 그 차량 봉쇄를 뚫었다. 하지만 한강 다리 중간 지점에 헌병대의 새로운 저지선이 있었다. 박 소장은 차에서 내렸다. 헌병대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박 소장은 무시한 채 다리 위를 앞장서 걸었다. 그 장면은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침착한 솔선수범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박 소장의 결의는 극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
광명인쇄소에 있던 나는 그 일을 알 수 없었다. 초조감이 엄습했다.
새벽 4시25분쯤 수십 발의 총성이 새벽의 고요함을 깼다. 그 총소리는 거꾸로 내게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혁명이 무산되진 않았구나.” 총소리는 장면 국무총리 체포조에서 나왔다. 체포조는 박종규 소령 주도하에 차지철 대위 등 공수단 중대장 6명으로 구성됐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의 실권자인 장 총리의 숙소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체포조가 급습하기 10분 전에 장 총리는 피신했다. 장 총리는 혜화동의 카르멜 수도원으로 숨었다. 총리 체포조는 작전에 실패했다. 그 화풀이를 하는지 그들은 공중에 대고 총을 쏜 것이었다.
그리고 10분이 지났을까. 인쇄소 앞에 지프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났다. 박 소장이 인쇄소에 들어왔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장도영이가 헌병을 시켜 나를 쐈어. 내가 목숨 걸린 우리들의 혁명계획서까지 그에게 전부 주었는데. 이럴 수 있나” 하고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물었다. 박 소장은 그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간략히 말해줬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헌병들이 쏜 총알이 막 날아와. 나는 지프에서 내렸지, 그리고 다리를 걸어서 건너갔지. 이쪽에서 응사하니까 잠시 후 헌병대가 싹 사라졌어.”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