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3.20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 혁명 전야
박 소장 “혁명공약 6항에 원대복귀”
난 ‘결국 없어질 조항’ 생각하며 동의
군사혁명 계획서 건네받은 장도영
거사 앞둔 한 달 동안 묵묵부답
“그는 어느 편 설지 불확실한 인물”
강한 반대에도 박 장군 뜻 안 꺾어
군화 신고 권총 찬 채 마루에 앉아
‘진인사대천명’ 출동시간 기다려
1961년 6월 12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구장, 2007년 헐림)에서 열린 ‘국가재건 범(汎)국민운동’ 촉진대회.시민·학생 7만여 명이 참석한 대회에서는 5·16 군사혁명을 국민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용공사상 배격 등을 결의했다. 윤보선 대통령(오른쪽)의 치사, 국가재건최고회의 장도영 의장(중장, 왼쪽)의 격려사에 이어 박정희 부의장(소장, 가운데)이 선창하면 참석자 모두가 뒤따라 만세를 외쳤다. 장·박 두 사람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대중 집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박정희는 어깨띠에 묶은 리볼버 권총을 왼쪽 허리에 찼다. 권총은 통상 오른쪽 허리춤에 찬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은 특이하다. [사진 국가기록원]
1961년 5월 15일,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군복을 꺼내 입었다. 석 달 전 강제예편으로 옷장에 넣어뒀던 군복이다. 허리엔 권총을 찼다.
신당동 언덕배기에 있는 박정희 소장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정리 작업이 남아 있었다. 나는 품에서 혁명공약문 초안을 꺼내 박 소장에게 보여드렸다. 이틀 동안 가다듬은 5개 항 공약이었다. 그는 찬찬히 읽어보더니 “좋구만”이라고 했다. 글자 한 자 바꾸지 않았다.
박 소장이 불쑥 말했다. 마지막 항목을 추가하자고 했다. 그 요지는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혁명군의 원대복귀-. 거사를 준비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성질서를 붕괴시키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일을 한 이상 군으로 돌아가진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복귀하면 다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숨 걸고 나서는 이유가 사라진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박 소장의 주장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강했다. 순수한 발상이었다. ‘내가 무슨 정권이 탐나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과업이 일단락되면 민간에 정권을 넘기고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그의 구상은 외국의 선례도 염두에 둔 듯했다. 내가 짐작하기에 박 소장은 버마(현재 미얀마)식 군부통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버마의 네 윈 장군은 58년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60년 2월 총선거를 실시했다. 군부세력은 출마하지 않았고, 네 윈은 민정 이양 뒤 군에 복귀했다(그 후 62년 3월 2차 쿠데타).
혁명취지문과 공약, 포고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발표키로 했다. 장도영 총장(중장)을 앞장세우자는 것 역시 박정희 소장의 복안이었다. 박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 신분으로는 혁명군을 대표할 수 없다. 나는 2선으로 물러서고 장 총장을 1선에 모시자.” 나는 반대했다. “장 총장은 저도 잘 알지만, 모시고 할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내 머릿속엔 장 총장의 미덥지 못한 행각이 떠올랐다. 한 달여 전 4월 10일이었다. 박 소장이 군사혁명 계획서를 집으로 갖고 오라고 했다. 포섭한 동지의 역할과 출동부대 편성, D데이까지 진행 과정 등이 담긴 대여섯 장의 극비서류였다. ‘혁명’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지만 거사 전모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박 소장은 “장도영 총장에게 가서 이걸 보여주고 선두에 서 달라고 설득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 그걸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를 잡아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큰일 납니다.”
“아니야, 괜찮아. 장 장군은 임자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내 입장에선 장도영을 끌어오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나한테 맡기고, 그 계획서를 주게.”
박 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장 총장보다 나이가 6살 위다. 하지만 군문에 장 총장(군사영어학교)이 먼저 들어왔다. 박 소장(육사 2기)은 상관인 장 총장의 신세를 여러 번 졌다. 1950년 육본 정보국 문관(文官)으로 근무하던 그를 현역(소령)으로 최종 복직시킨 인물이 장도영이었다. 장도영은 9사단장 시절 박정희 중령을 참모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박 소장은 장 총장과 오랫동안 쌓아온 신의를 굳게 믿고 있었다.
1961년 5월 18일 서울시청 앞에서 5·16 지지 가두시위를 한 육사 생도들에게 경례하는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오른쪽). 박정희의 검은색 선글라스는 5·16의 이미지로 굳어졌으며, 때로는 쿠데타의 상징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JP는 “박 장군이 5·16 때 선글라스를 쓴 것은 얼굴 일부를 가려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위엄을 더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중앙포토]
나도 6·25가 발발했을 때 육본 정보국에서 장도영 국장을 상관으로 모셨다.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판단력은 인정할 만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 동지들의 생명이 달린 거사다. 장 총장은 어느 편에 설지 확실치 않은 인물이었다. 자칫 위험할 수 있었다.
나는 품속의 계획서를 꺼내 박 소장에게 건네면서 신신당부했다. “드리긴 하겠는데, 사흘 안에 돌려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반란으로 몰아 몰살시킬 수 있는 계획서입니다. 그쪽에 내줬다가는 후환이 생길지 모릅니다.” 박 소장은 “그래, 사흘만 보게 하고 꼭 돌려받겠다”고 약속했다. 박 소장은 그날 장 총장에게 찾아가 계획서를 전달했다.
그 뒤로 계획서는 내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장 총장은 거사 순간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의 걱정에도 박 소장은 뜻을 꺾지 않았다. “나를 간판으로 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였다. 육군 최고 지휘관인 참모총장을 내세워야 군 내부를 장악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담겼다. 박 소장은 과거 좌익 연루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군 지휘부와 주한 미군에서 사상을 의심받고 있었다. 그가 정점에 서면 좌익 꼬리표를 빌미로 집중 공격 당할 우려가 있었다. 나 역시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 1의(義)로 삼는다’는 문구를 공약 첫머리로 내세웠다. 박 소장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여긴 듯했다. 나는 결국 장도영 1선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궐기를 세상에 알릴 발표문의 모든 문구가 5월 15일 오후 늦게 완성됐다. 이낙선 소령(육본)이 고쳐진 초안을 정서(精書)했다. 나는 원고를 잘 접어서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결의가 굳어졌고 내 마음속 긴장감도 고조됐다. 출동의 시간이 오길 기다렸다.
박정희 소장은 신당동 집 마루에 의자를 내놓고 앉았다. 군복을 차려입고 권총을 찬 채 군화를 신었다. 언제든지 궐기를 위해 나갈 채비가 돼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린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이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였다. 시간은 흘렀다. 밤 11시30분, 박정희 소장의 집을 나섰다. 나는 박 소장이 탄 지프차 뒤에 한웅진 준장(육군 정보학교장)과 함께 올랐다. 집 앞엔 정체불명의 검은색 지프차 두 대가 지켜보고 있었다. 헌병대였다. 거사 정보가 누설된 것이다. 행동은 시작됐다. 이제 누구도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혁명 전야는 이런 장면이었다.
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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