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3.30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3> 미 8군 사령관과의 담판
“군인 아닌 혁명 지도자로 예우”
미8군 측, 사복입고 오라 요구
“궐기군 당장 원대복귀시켜라”
매그루더, JP의 배포 시험해
“우리를 부정할 거면 가겠다” 반격
내 기세·진심에 흉금 터놓고 대화
거사 인정, 전방부대 원위치 합의
3번 회동 … 박정희에게 매번 보고
1962년 10월 28일 미국을 방문할 때 매그루더 전 주한 미군 사령관(왼쪽)을 찾아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워싱턴DC와 포토맥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매그루더의 자택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JP는 “그 자리에서 매그루더 장군이 ‘당신을 만나서 한국에 아주 젊은 애국자가 있는 걸 알았다’기에 누구냐고 물으니 ‘당신’이라고 해서 와 웃었다”고 회고했다.
돌이켜보면 미8군은 3600명의 혁명군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5만6000명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을 의심했다.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박 소장을 강제예편시키려 했다.
그러나 영향력과 행동력은 다를 수 있다. 혁명을 준비하면서 나는 해외 주둔 미군의 행태를 조사·분석했다. 주둔국에 쿠데타나 내전이 일어났을 경우에 초점을 맞췄다. 미군의 행동 방식은 비슷했다. 쿠데타군이 미군을 공격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입하지 않았다. 미군은 자기들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주둔국 일에 나서지 않는다. 더구나 주한미군은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었다. 서울 지역의 주한 미군만으로 혁명군을 압도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 해결은 못하고 부작용만 낳을 수 있다. 미군이 행동으로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매그루더가 5월 16일 오전 AFKN을 통해 “군사 쿠데타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나는 겁나지 않았다. 미군 사령관의 선언은 입장 표명의 수준이었다. 말만 했지 행동으로 한 건 하나도 없다. 말로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목숨 걸고 덤비는 혁명군의 결행력을 제압할 순 없는 법이다.
오전 10시. 미8군 사령관실 문이 열렸다.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통역을 맡은 한상국 중령이 서 있었다. 정면 의자에 매그루더 사령관이 앉았다. 옆 소파 군인도 별 넷 대장이었다. 한 달 뒤 매그루더의 후임자가 될 멜로이(Guy S. Meloy Jr.) 대장이었다. 나는 멜로이 옆에 앉도록 안내됐다.
매그루더 장군은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짐을 진 채 사무실을 이리저리 오갔다. 키가 크고 뚱뚱한 몸집이다. 내 눈에 그는 우리 안에 갇힌 성난 사자가 왔다갔다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휙 돌아서며 소리를 쳤다. “내 지휘 아래 있는 군대를 이끌고 일을 벌였다고. 무슨 혁명을 했다고. 당장 부대를 원위치로 복귀시켜라.” 나는 의도적으로 착 가라앉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만나자고 한 게 그런 협박을 하기 위해서였소.”
1961년 7월 23일 인천 송도유원지에서 혁명정부와 주한 미국 측 수뇌부가 편안한 복장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표정들이 심각하다. 왼쪽부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새무얼 버거 미국 대사(등 보이는 이), 가이 멜로이 미 8군 사령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매그루더=“한국군 지휘권은 내게 있다. 당신들이 내 허락 없이 전방부대를 이동시킨 것은 마이어 협정 등 위반이다. 원위치시켜라.”
▶나="우리는 레볼루션(Revolution·혁명)을 한 사람들이다. 레볼루션을 하면서 어떤 녀석이 몇 날, 몇 시에 어떤 부대를 이끌고 혁명하겠다고 미리 신고하느냐. 그런 레볼루션도 있나.”
나의 거친 반격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매그루더는 “내 지휘권 침해를 용인할 수 없다”고 또 소리쳤다. 그때 나도 맞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우리 혁명을 부정하는데 그럴 거면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나는 간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상국의 통역은 열정적이었다. 매그루더와 나의 제스처·어조를 그대로 따라 하며 말을 옮겼다. 일어서려는 내 손을 지그시 잡고 자리에 끌어 앉힌 건 멜로이 대장이었다. “가지 마라. 우리가 오늘 만난 목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하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체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만나자고 했으면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성난 사자 모양으로 협박하는 분위기에서 무슨 상의가 되겠느냐.” 그제야 매그루더 대장이 웃으면서 태도를 바꿨다. “부러 그랬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매그루더는 나보다 26살이 많은 역전노장이다. 주로 군수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내 배포와 스케일을 테스트한 것이다.
대화는 정상화됐다. “당신들은 어떤 사람인가. 왜 혁명을 하려 했나.” 매그루더는 근원적인 문제를 내게 물었다. “나는 포트 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해 미국을 좀 봤다. 근대화된 인사관리, 물자관리, 조직관리 방법을 배웠다. 이런 미국을 우리나라에 비춰 보니 나라 꼴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전부 뒤집어서 새로 해야겠다는 발상뿐이었다. 구 정치인들은 머릿속에 욕심밖에 없고 싸움만 했다. 당신의 조국처럼 우리도 밥 먹는 거 걱정 안 하고 자유롭게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이게 혁명을 한 이유다.”
미리 준비한 말은 아니었다. 나의 진심이었다. 1951년 여름 6개월간 미국에 유학하면서 풍요와 자유가 넘치는 비결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25살 대위 때다. 이런 배움과 생각이 답변의 바탕이 됐을 것이다.
매그루더는 군사혁명정부의 계획과 정책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그건 내가 끊임없이 준비하고 정리해온 문제다. “우선 배고픔부터 없앨 것이다. 외국 자본을 끌어다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산업을 일으켜 국민이 잘살게 되면 민주화를 달성할 것이다. 미국의 지원을 기대한다.” 내친김에 한·일 관계에 대한 나의 비전도 얘기했다.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열려고 한다. 우리가 일본과 손을 잡으면 미국의 태평양 방위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나의 답변은 거침없었다. 매그루더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흉금을 털어놓은 비공개, 비공식 회담이었다. 이날 대화에서 나는 매그루더의 진의를 알게 됐다. 그는 자신의 훼손된 작전지휘권을 원상으로 돌려받길 원했다. 혁명정부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매그루더도 나의 진심을 이해했다. 나는 미 사령관의 작전지휘 권한에 상처 낼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혁명정부를 스스로 지킬 병력만은 확보해야겠다고 강조했다. 매그루더의 요청으로 우리는 20, 25일에도 만났다.
대화 결과는 매번 박정희 소장에게 보고했다. 처음 보고 때 박 소장은 “매그루더가 자네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래”라고 물었다. 나는 “제가 혁명을 지도하는 것 같아 보자고 한 거랍니다”라고 답했다. 박 소장은 “보기는 잘 봤구먼”이라고 했다. 매그루더와 나는 서로 건드려선 안 될 것과 얻어낼 수 있는 것의 경계를 헤아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5·16 이후 새로운 한·미 질서에 관한 주요한 합의가 마련됐다. 미군은 5·16혁명을 인정하고 혁명정부에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혁명정부는 서울에 진주한 전방부대(6군단 포병단, 해병1여단)를 원위치시키기로 했다. 다만 그 이전에 혁명정부를 방위할 수도방위 사령부부터 신설하기로 했다. 주요 군 인사를 할 때 사전 협의하겠다는 약속도 해줬다. 나와 매그루더의 합의는 5월 23일 박정희 소장과 매그루더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합의는 5월 26일 한·미 간 공동성명 동시 발표로 확정됐다.
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