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4.0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5> 한국판 CIA의 출범
육본 정보국 육사 8기들이 주축
신직수 변호사가 정보부법 다듬어
JP, 최고회의서 수사권 반납 약속
민정 이양 뒤에도 지켜지지 않아
"정보부 위세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검찰총장·방첩대장까지 업무보고
“때때로 월권 지탄받는 정보조직
중앙정보부 창설자로 책임 느껴”
1961년 8월 31일 서울 중앙정보부 남산청사를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화를 나누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 [사진 국가기록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과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위세에 붙은 비유다. 김종필(JP)은 중앙정보부의 창설자이자 초대 수장이다. 그가 회고하는 창설 이유는 이렇다. “혁명 과업을 뒷받침하려면 무서운 존재가 필요하다.” JP는 중정의 수사권 보유를 한시적인 특수 상황으로 규정했다. 민정 이양 때 수사권을 검찰에 환원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구상만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혁명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하고도 왜 최고회의 위원으로 나서지 않는가.” 1961년 6월 5일, 내가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받았던 질문이다. 나는 답했다. “나는 앞에 나서지 않고 중앙정보부장으로 일하려 한다.”
5·16 혁명의 성공으로 나는 ‘혁명 설계자’의 임무는 마쳤다. 이젠 혁명정부를 뒷받침하는 보조자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국가 개조라는 큰일을 이루려면 악역(惡役)도 필요하다. 혁명 정신, 궐기의 뜻을 아는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해야 한다. 남들은 해(害)가 돌아올까 두려워서 주저했다. 내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초대 부장이 된 이유다.
5월 19일 혁명위원회가 중앙정보부가 포함된 통치 체제 안을 통과시켰다(본지 4월 1일자 6, 7면). 다음날 나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명의로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다. 정보부 창설을 위해 먼저 한 건 우수한 두뇌들을 끌어모으는 일이었다. 이영근(중령)·서정순(중령)·김병학(중령)·고제훈(예비역 중령)을 불렀다. 육본 정보국에서 나와 함께 일했던 육사 8기 동기생들이다. 거사에 참여하란 제안을 거절했던 석정선(8기·예비역 중령)도 데려왔다. 머리가 좋은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정보부 창설 팀은 서울 시내 여관을 옮겨 다니며 일했다. 5월 23일 태평로 서울신문사 옆 국회별관(지금의 파이낸스센터 빌딩)에 정식으로 사무실을 열었다. 최고회의 건물 맞은편이다.
1961년 8월 24일 정일권 주미 대사(왼쪽 둘째)가 중앙정보부를 방문해 김종필 부장(맨 왼쪽)의 안내로 정보부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혁명의 특수 상황 때문이다. 혁명정부는 이제 출범했다. 아직 뿌리를 단단히 박지 못한 상태였다. 외부 세력이 혁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다면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었다. 별 사람이 다 와서 혁명 과업을 집적거리고 훼손하려 했다. 그래서는 어렵고 산적한 혁명 과업을 과감하게 추진해 나갈 수 없다. 그런 것을 막고 혁명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북한의 위협에도 대비해야 했다.
중앙정보부에 수사권을 부여하자. 혁명의 정착을 효과적으로 보조하려면 힘이 있어야 했다. 여러 고려와 고심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영근과 서정순 등이 중앙정보부법 법률안 초안을 잡았다. 나는 “법률 전문가인 신직수 변호사에게 보이고 검토받으라”고 지시했다. 신 변호사는 10년간 군 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개업 변호사로 활동 중이었다. 그가 초안을 다듬어 법조문을 완성했다. 중앙정보부법은 9개 조항으로 이뤄졌다. 핵심은 정부 각 부처 정보 수사 활동의 조정·감독권(1조)과 수사권(6조)이다.
5월 28일,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중앙정보부 법안 결재를 올렸다. 창설의 필요성, 이유와 배경을 설명했다. 박 부의장은 만족을 표시했다. 하지만 장도영 의장은 결재를 미뤘다. 결재 지연을 놓고 여러 얘기가 있었지만 의미 없는 지엽적인 것이었다. 나는 직접 장 중장을 찾아갔다. “현안 처리에 문제가 많으니 빨리 결재를 내주셔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 의장의 결재와 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6월 10일 중앙정보부법이 공식 공포됐다.
JP가 정보부장 시절 세운 부훈석(97년까지 사용). 부훈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이다. 이 부훈석은 현재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 보존돼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나는 5월 29일 검찰총장과 군 첩보대·공수부대·방첩대장의 업무 보고를 받았다. 정보업무를 조정·감독하는 권한에 따른 것이다. 31일엔 해군과 공군 정보국장을 만나 업무를 지시했다. 6월 10일 정식 창설식을 가졌다.
정보부 조직은 두 명의 차장 아래 4개국 체제로 구성했다. 행정관리차장은 이영근, 기획운영차장은 서정순이 맡았다. 제1국장(총무) 강창진, 제2국장(해외) 석정선, 제3국장(수사) 고제훈, 제5국장(교육) 최영택을 임명했다. 모두 육사 8기다. 거사에 도움을 준 장태화·김용태를 각각 정치·경제 담당 고문으로 위촉했다. 신직수 변호사는 법률 고문으로 영입했다. 부설 조직으로 정책연구실을 만들었다. 최규하·김정렴·김학열 등 관료 출신과 윤천주(고려대)·김성희(서울대)·강상운(중앙대) 교수 등 23명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정보요원은 육본 정보국과 방첩대(CIC), 첩보대(HID), 헌병대(CID) 출신 중 정보 업무를 해본 사람을 선택했다. 검찰과 경찰의 정보수사요원도 추천받았다. 선발 기준은 ‘얼마나 경험이 있느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소속으로 하와이에서 미군 암호를 해석했던 통신요원을 채용하기도 했다. 선발 못지않게 교육이 중요했다. 정보부 설립 뒤 서둘러서 이문동에 정보학교를 세웠다. 요원들은 거기서 교육을 받아야 본부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교육 과정에서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원대 복귀시켰다.
국가의 새 질서를 만들려면 무서운 데가 하나 있어야 했다. 무섭다는 게 다른 게 아니다. 엄존(儼存)하면서 사안을 다룰 때 엄정하게 법대로 하면 그게 바로 무서운 곳이 된다. 외부에 큰소리를 쳐서 무섭게 해놓고 일은 조용히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때 국민들은 정보부를 가리켜 ‘씨에(CIA)’라고 불렀다. ‘잘못하면 씨에에 잡혀간다’며 무서워들 했다. 나를 두고는 이런 말까지 생겼다. “우는 애도 정보부장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 중앙정보부는 수사권을 가지고 무서운 존재로 혁명정부를 강력히 뒷받침했다.
나는 정보부에 수사권을 한시적으로 부여할 계획이었다. 정보부가 수사권을 쥐면 미국의 CIA와 연방수사국(FBI)의 권한을 모두 갖게 된다. 그런 예외는 혁명정부에서만 유효해야 했다. 최고회의에서 입법 취지를 설명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수사권은 혁명정부 기간에만 잠정적으로 갖는 겁니다. 민간정부가 정식 출범한 뒤엔 수사권은 법무부 수사국에 환원시킵니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63년 1월 정보부장직을 내놨다. 그해 12월 민정으로 이양했지만 정보부는 수사권을 유지했다. 그 후 후임 부장들 일부는 정보부의 기본 임무와 역할을 망각했다. 정치적 상황에 편승해 때로는 월권과 남용으로 국민의 지탄과 원성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수사권을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음지와 양지’의 정신도 훼손됐다. 나는 정보부 창설자로서 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신직수(1927~2001년)=역대 최장수 검찰총장(7년6개월). 전주사범을 나와 10년간 군법무관으로 근무하다 소령으로 예편했다. 박정희 준장의 5사단장 시절 법무참모로서 그의 신임을 받았다. 5·16 직후 중앙정보부 법률 고문 을 맡았다. 63년 7월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63년 12월 36세의 나이로 검찰총장에 발탁됐다. 71년 6월 법무부 장관에 올랐다. 이후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 법률 특별보좌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