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4.08 0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7> 인간 JP의 성장
곶감보다 못한 사람 대접에 분노
교장 “사상 나쁜 조선놈 있다” 신고
대전 헌병대 끌려가 철창에 갇혀
감방서 발진티푸스 걸려 생사 오가
교생 마치고 결국 벽지 학교 발령
“일본 망했다” 어머니, 해방 알려
교사 되기 전 학창시절에 독서광
1일 1권 독파, 내 지식·상식 원천돼
중학생 시절 검도·



대전사범학교의 수료(교사자격증 부여 1년 과정) 성적이 좋았는데도 벽지로 발령받은 데는 사연이 있었다. 대전 동광국민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하던 1944년 10월이었다. 부친의 회갑연에 참석하려고 부여 집에 들렀다 돌아가는 내게 어머니는 곶감을 4접(1접은 100개)이나 싸주셨다. “하숙집 주인 주고, 사범학교 담임과 너 근무하는 국민학교 교장선생님 드려라. 남은 하나는 너 먹고.”
사탕 하나 구해 먹기 힘든 일제 말기였다. 나는 저녁 무렵 곶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동광국민학교 일본인 교장 기시무라 집으로 향했다. 현관을 들어서니 부엌에서 도마 소리가 들렸다. 교생 김종필이 왔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한참 불렀더니 방에서 어린 학생 딸이 나오길래 “선물이니 아버지 드려라”라며 건네주려 했다. 그때 ‘선물’ 소리를 들은 교장 부인이 얼른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못 들은 체할 때는 언제고, 이제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곶감을 받으려 했다.
‘에잇, 고약한 여편네.’ 나는 곶감을 도로 가지고 하숙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조회 시간. 기시무라 교장이 나를 앞으로 나오라더니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게 아닌가. 그는 “젊은 놈이 그런 실례가 어딨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대들었다. “그럼 당신 부인은 실례 아니냐.” 그 소리에 교장이 또 한 대 때리려고 들길래 냅다 덤벼들어서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았다. 나는 평소 기시무라 교장이 조선인을 무시하고 민족감정을 긁어 내리는 데 대한 반일감정으로 더욱 거세게 그를 몰아붙였다. 기시무라 교장은 다른 선생들이 말려서 간신히 곤죽이 되는 걸 피했다. 그는 씩씩거리며 대전 헌병대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아주 사상이 나쁜 조선 놈이 있는데 데려다가 당장 취조하시오.” 그 길로 출동한 헌병대 차에 실려서 철창에 갇혔다.

차가운 감방 바닥에서 맞이하는 밤은 지독히 추웠다. 나눠준 모포에는 허연 이가 기어 다녔다. 그 모포를 덮은 채 이에게 뜯기면서 일주일을 갇혀 있었다. 헌병대는 내가 누구인지 조사를 했다. 사상이 불순하다고 낙인찍을 거리가 없었는지 일주일 뒤 풀어줬다. 하숙집에서 자다 깨보니 온몸이 정신없이 아프고 열이 끓었다. 발진티푸스였다. 감방에 있던 이에게 옮은 것이다. 걸리면 80%가 죽는다던 무서운 병이었다. 아버지 주선으로 대전 도립병원에 격리입원 됐다. 병상에서 40도 넘는 고열과 사투를 벌이면서 꿈을 꿨다. 70년 넘게 지난 지금도 그 꿈의 한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다.

일본인 교장을 때린 한국인 교생이란 기록 때문에 난 충남 바닷가 마을 보령군 천북면으로 발령받았다. 유배당하는 기분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누군가가 그곳으로 날 이끌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천북 옆 오천은 아버지가 스무 살 때 측량기사로 일하기 시작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일제 동양척식(拓殖)회사가 부당하게 빼앗아간 농민 땅을 측량을 통해 주인들에게 되찾아줘 마을에서 인심을 얻으셨다. 지금도 오천엔 주민들이 세운 아버지를 기리는 송덕비가 있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활동무대였던 그곳에서 아들인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똑같은 나이 스무 살에 말이다.


다시 천북국민학교 교사 시절로 돌아가자. 학교 근무 4개월이 지나 방학을 맞았을 때다. 부여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일본이 망했단다.” 잠결에 “예? 뭐요?”라고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일본이 망했다고 천황이 방송했단다. 일어나봐라”고 하셨다. 벌떡 일어났다. 라디오에선 일본 천황이 금속성의 고르지 못한 음성으로 항복을 고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무작정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해방이 됐다는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남대문 앞에서 난생처음으로 태극기를 봤다.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아, 진짜 해방이로구나.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가슴을 꽉 메웠다. 용산에 있던 그 많던 일본군 20사단 군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그해 10월 나는 대전사범학교 부속 국민학교로 전근 갔다. 내 머릿속엔 광복 날 서울에서 본 그 광경이 떠나지 않았다. 해방을 맞은 이 조국에서 국민학교 교사 생활에 안주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6년 상경해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부에 응시해 합격, 3월에 입학했다. 영국 이튼(Eton) 스쿨에 대한 동경이 날 사범대로 이끌었다. 1815년 영국 웰링턴 장군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한 뒤 “어떻게 그 유럽의 망나니를 이길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이튼 정신을 가지고 싸웠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래, 나도 이튼 스쿨 같은 학교를 만들자. 해방된 조국을 이끌어갈 후진을 키워보자. 이런 꿈을 가졌다.
1947년 5월 13일 서울에서 비보를 접했다. 수년간 중풍을 앓으셨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는 해방 전후 인삼 재배와 금광 개발 사업에 뛰어드셨다가 크게 실패를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는 급속도로 기울어 파산 지경이 됐다. 부유하고 평탄했던 내 어린 시절과 작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