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4.0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6> 장도영 육참총장 제거
계엄사령관 등 5개 직책 한 손에
장 의장은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
”육사 5기, 7월 3일 박정희 친다” 첩보
자칫 잘못하면 혁명 결딴날 위기
D데이 새벽 장도영 급습, 자택 연금
나에게 “왔구먼, 이제 왔어 … ” 체념
박치옥 등 반혁명 세력 44명 체포
JP “혁명 일사불란해야 할 시점”
1971년 6월 10일 영빈관(현 신라호텔)에서 열린 중앙정보부 창설 10주년 기념연회에 참석한 역대 중앙정보부장들. 왼쪽부터 김종필(초대), 김용순(2대), 김재춘(3대), 김형욱(4대) 전임 부장과 이후락(6대) 현직 부장. 김종필이 국무총리에 취임(6월 4일)한 직후다. 5대 부장 김계원은 당시 대만대사로 나가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이후락 부장은 이 자리에서 “중정 출신 국회의원이 13명”이라고 말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61년 5월 24일 장도영은 난데없이 기자회견을 통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전날인 23일엔 박정희 부의장이 매그루더 사령관과 회동하는 등 미군이 혁명정부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시기였다.
장 의장의 발표는 우리와 사전에 상의 없이 이뤄져 ‘도대체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서 무슨 언질을 받아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생겼다. 그는 또 사흘 뒤엔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꿨다. 이 역시 우리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
장 의장의 속을 알 수 없었다. 혁명 전후 그의 기회주의적인 행적은 나의 주시 대상이었다.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4월 10일에도 그는 박정희 소장을 통해 내가 작성한 혁명계획서를 전달받았지만 끝내 반환하지 않았다. 5·16 새벽엔 한강 다리를 건너던 혁명군에 발포를 명령하더니 오후엔 혁명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나는 이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혁명을 흔드는 세력을 눌러야 했다. 5월 31일 장 의장은 AP통신과 회견을 통해 8월 15일을 전후해 민정 이양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윤보선 대통령의 내심을 반영하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장도영의 인맥이 최고회의, 내각, 국영 기업체를 속속 파고들어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나라를 근대화하겠다고 시작한 혁명이었다. 나는 그의 언행이 혁명의 대업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혁명을 도려내는 악역을 맡아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장 의장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여야 했다. 이를 위해 6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최고회의 의장은 타직(他職)을 겸임할 수 없다’는 조항을 의결했다. 또 최고회의법에 따라 국정을 총괄할 상임위원장직을 박정희 부의장이 맡게 되자 장 의장은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자기와 친한 최고위원들을 불러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 셈인가. 박 장군과 나를 놓고 신임투표를 해 볼까”라며 분노했다. 5·16을 전후해 장 의장을 중심으로 군내 ‘족청(族靑)계’ 중 일부 이북 출신 인사들은 뚜렷한 세력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족청계는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조직한 ‘민족주의청년단’의 약칭이다. 6월 6일 최고회의는 장 의장의 반발을 의식해 의장이 내각수반(국무총리 역할)은 겸임할 수 있도록 ‘국가재건비상조치법안’을 수정했다. 하지만 장 의장은 군 지휘권의 상실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중앙청의 내각수반 방에 들어앉아 측근들과 함께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왔다.
거사 때 6군단 포병단장이었던 문재준(육사 5기) 대령은 장 의장의 측근으로 5월 21일자로 헌병감이 됐다. 그는 공개적으로 박 부의장에게 대들었다.
1961년 11월 30일 ‘반혁명사건’ 공판이 열린 혁명재판소 법정에서 피고인 장도영(38) 전 최고회의 의장(왼쪽)이 증인으로 나온 유원식(47) 준장을 신문하고 있다. 유원식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자 장도영은 피고인으로서 증인을 직접 신문하겠다며 나왔다. 장도영은 유원식이 권한 의자를 사양하고 옆에 서서 질문했다. 장도영은 옛 부하인 유원식에게 깍듯이 존대를 썼다. [중앙포토]
나는 장 의장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박 부의장에게 보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척 고민했지만 결국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인디언 아파치족은 미군 토벌대와 맞서 싸우기 전 “Now you die(너 이제 죽는다)”라고 외치며 달려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심정으로 장 의장을 겨냥했다. 장 의장은 그런 우리의 움직임을 예감했는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앙청 내각수반실 안의 부속실에 머물렀다. 내각수반실엔 권총으로 무장한 헌병 10여 명이 늘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나는 중앙정보부 요원 20여 명을 동원하고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7월 2일 오후 장도영 체포를 지시했다. 이튿날 새벽 정보부 요원들의 기습적인 중앙청 진입에 헌병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장 의장은 자택에 연금됐다. 그 직후 내가 장 의장 집으로 갔더니 “왔구먼, 이제 왔어…”라며 체념하는 투였다. “각하,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장 중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나 미국에만 보내 주게”라고 답했다. 나는 “좋습니다. 미국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가시기 전에 약식(略式) 군사재판은 거치셔야 합니다”고 했다. 장 의장을 연금한 후 박 부의장의 장충동 공관을 바로 찾아갔다.
◆나=“장 의장을 체포해 집으로 모셨습니다. 이제 군사재판에서 따질 것을 따져야겠습니다. 대신 ‘미국으로 보내 달라’고 하시길래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각하가 동의해 주셔야겠습니다.”
◆박 부의장=(아주 놀란 기색으로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 어쩌려고 그런 일을 벌였나, 그런 일을….”
◆나=“어차피 겪어야 할 혁명의 과정입니다. 놀라실 일 없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전부 저를 추궁하십시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박 부의장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럼, 할 수 없지”라고 했다. 박 부의장은 장 의장에 대해 고마움과 애틋함이 있었다. 좌익 혐의로 문관으로 쫓겨나 있던 박 부의장을 소령으로 최종 원직 복귀시켜 준 사람이 장 의장이었고, 보안 심사에 걸려 강제 예편 위기에 몰렸던 박 부의장을 자기 밑의 2군 부사령관으로 받아들인 것도 장 의장이었다.
박 부의장은 장 의장이 반혁명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을 때 “혁명에도 의리가 있다”는 감상을 드러냈다.
장 중장의 연금과 함께 그에게 붙어 반혁명을 도모하던 사람들도 모두 체포했다. 이때 체포된 사람이 44명이다. 송찬호 고사포 여단장, 문재준 헌병감, 박치옥 공수단장(이상 최고위원), 내각수반 비서실장인 이회영 대령,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안용학 대령 등 육사 5기생들이 대거 포함됐다. 장도영 장군은 나중에 풀려나 미국에 건너갔다. 공부를 더해서 93년까지 미시간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으며, 2012년 타계했다. 세상을 뜨기 전 그는 한 측근을 내게 보내 이런 말을 전했다. “나는 박정희나 김종필 당신에게 조금의 유감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장도영 의장과 그 주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는 5·16 이후 발생한 첫 번째 반혁명사건이다. 반혁명사건을 혁명 주체의 내부 분열 혹은 주도권 다툼 같은 권력 투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실병력 동원의 지휘자들이었던 육사 5기 세력과 기획·행동 실무를 주로 맡은 8기의 충돌이라는 시각도 있다. 장 의장을 명예롭게 퇴진시킬 순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거사를 함께한 동지였다. 그들을 체포할 때 고뇌와 아픔이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혁명을 지켜 나가기 위해 일사불란함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었다. 작은 분열이 삽시간에 전열을 무너뜨릴 수 있다. 안타깝지만 당시로선 어쩔 수 없었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박치옥(1925~2005년)=5·16 때 김포 공수특전단장(대령·육사 5기)으로 거사에 참여했다. 공수단은 계획상 한강인도교를 제일 먼저 건너기로 돼 있었으나 박 단장이 장도영 육참총장 측의 방해를 받아 출동이 늦어진 등의 이유로 해병대가 선두에 섰다. 김재춘(6관구 참모장)·문재준(6군단 포병단장) 등 육사 5기 동기생들과 함께 실병력을 동원한 공으로 최고회의 위원이 됐다. 육사 8기 출신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대립하다 장도영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