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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기질 세상에 퍼뜨려라" 박정희·JP 새 통치체제 구축 … 30·40대 젊은 권력의 탄생

바람아님 2015. 8. 2. 00:30

[중앙일보] 입력 2015.04.0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4>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헌법 정지로 생긴 권력의 공백에
국가 3권 장악한 .최고회의. 들어서
일부 “최고회의는 공산당 용어” 반발
박 소장 “명칭이 뭐 중요한가” 관철
장교 1만여 명 미국서 유학생활
실무·합리적 미국식 관리체제 익숙
비 안 오면 기우제 지내는 국민의식
물 쟁여놓는 정신으로 바꾸는 게 목표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열린 뒤 최고위원들과 새로 임명된 내각의 각료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국가경영 세력의 근본적인 변화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앞줄 왼쪽부터 배덕진 체신장관(준장), 고원증 법무장관(준장), 이주일 최고위원(소장), 김홍일 외무장관(예비역 중장), 박정희 부의장(소장), 장도영 의장(중장), 김종오 합참의장(중장), 김동하 위원(예비역 해병 소장), 박임항 위원(중장), 김신 공군참모총장(공군 중장), 김성은 해병대사령관(해병 중장), 정래혁 상공장관(소장).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돼 최고위원을 맡지 않았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61년 5·16은 구질서의 권위와 기능을 정지했다. 그날 내가 작성해 KBS방송으로 내보낸 포고문(4호)은 이랬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오늘 오전 7시를 기해 일체의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 민의원과 참의원, 지방의회는 오후 8시를 기해 해산한다. 국가기구의 일체의 기능은 군사혁명위원회가 집행한다.”

 혁명위원회가 행정권을 장악하고 입법부를 해산시킨 것이다. 사법부 기능까지 집행한다고 했다. 군사혁명위의 3권 통합 행사 선언이었다. 5월 18일 피신했던 장면 총리가 나타났다. 그는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구질서의 중심인 그가 퇴진했다.

 포고문은 이제 실행되기 시작했다. 정지된 헌법과 권력의 공백은 포고문이 메울 것이다. 새로운 시대, 결정적인 역사 전환의 무대가 열렸다. 이게 혁명이다. 혁명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제까지 구질서 종료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새 질서 출발에 모아져야 한다. 17일 밤 나는 육군본부의 한 사무실에서 꼬박 날을 새웠다. 거사의 성공이 예감되던 시점이다. 나는 그동안 생각해두었던 신질서의 바탕이 될 통치 체제를 구체적으로 짰다. 혁명의 미래를 운영할 수단과 집행 방법을 담은 그랜드 디자인을 마련한 것이다.

 18일 낮 장면 총리의 사임 직후다. 나는 바로 박정희 소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새벽까지의 작업 내용을 보고했다. 이미 박 소장과 나는 혁명 이후의 그림을 함께 그려왔다. 박 소장은 19일 오후 3시 군사혁명위원회 소집을 결정했다. 혁명 체제를 신속히 확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육사 동기생(8기) 최영택 중령에게 차트 작성을 부탁했다. 최 중령은 첩보부대(HID)에 근무하고 있어 보안 유지에 적임이다. 이튿날 오후에 군사혁명위 1차 회의에 참석했다. 육본 회의실엔 32명(혁명위원 30명, 고문 2명)이 착석해 있었다. 위원 구성과 명단은 전날 장도영 혁명위원회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상의해 발표했다. 이로써 혁명의 앞날이 불투명했을 때 감돌던 불안과 초조함은 사라졌다. 나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먼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자고 했다.

 ‘위원회’는 비상 상황에서 약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최고회의’는 나라의 방향과 의사를 결정, 주도하는 최상위 수준의 지위와 권한을 함축했다. 입법·사법·행정권을 쥐고 있는 만큼 ‘최고’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국가 재건’은 혁명의 미래와 비전을 압축한다. 혁명의 진정한 가치는 국가 사회의 본질적 변화에 있었다. 나는 정쟁과 누습(陋習), 혼란에서 벗어나자는 혁명 궐기의 절실함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것이 혁명의 지향점을 국민에게 실감시키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된 것이다.

 문재준(6군단 포병단장)·박치옥(공수단장) 위원이 내 브리핑을 끊고 들어왔다. 그 둘 대령은 육사 5기 동기다. “최고회의란 말이 공산당식 용어 아니냐”고 비판했다. 그들과 같은 이북 출신 위원들이 주로 흥분해 가세했다. 위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으로 시간이 꽤 흘렀다. 그때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박 소장이 단상으로 나왔다. “조용히들 합시다. 여러분, 명칭이 뭐 그리 중요하기에 그 야단이요. 나는 명칭보다는 우리가 얼마만큼 국민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느냐, 그 점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시간이 급하니 따질 것이 있으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다음 내용을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실내는 찬물 끼얹듯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지휘, 감독하는 국가 최고 통치기관입니다.” 그리고 최고회의 직속으로 총무처, 공보실, 중앙정보부, 국가재건기획위원회,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수도방위사령부 등 6개 기구를 둔다고 설명했다. 통치 기구안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이 가운데 수방사는 미군 사령관과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문제는 내가 매그루더와 회동에서 관철시켰다(본지 3월 30일자 6, 7면). 최고회의 의장과 부의장엔 장도영 중장과 박정희 소장이 각각 추대됐다. 최고회의 건물도 육본(삼각지)에서 태평로의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 의회)으로 옮기기로 했다.

1961년 7월 7일 예술인 200여 명이 서울 국도극장 앞길에서 국가재건국민운동 참여 결단식을 열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왼쪽)을 향해 변형두 단장이 결의문을 읽고 있다. 그 뒤에 영화배우 황해, 허장강(맨 오른쪽) 부단장이 완장을 차고 있다. 박 의장 바로 옆은 송요찬 내각 수반. 그 옆은 넥타이를 맨 김종필 중정부장.

 이런 방안의 대강은 거사 이전에 그려진 것이다. 그해 3월부터 내가 기본안을 제시하면 박 소장이 수정, 보완했다. 5·16은 기획부터 국가 재구성을 위한 기본 통치 체제까지 사전에 구상했다. 그냥 기분이 나쁘니 세상을 엎어보자고 한 게 아니다. 혁명 이후 국가 경영의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최고회의는 6월 6일 혁명헌법을 마련했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의 제정이다. 이 법에 따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민정 이양 때까지 최고 통치기관의 지위를 갖게 된다.

 32명의 장군·장교로 구성된 최고회의는 그 자체가 입법부였다. 해산된 국회의 권한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행정권은 최고회의가 직접 행사하진 않았다. 대신 내각을 지시·통제할 권한을 가졌다. 내각은 최고회의에 연대 책임을 진다고 규정했다. 내각의 장관들 역시 현역 군인들로 임명했다. 사법 행정도 최고회의가 지시·통제한다고 명시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 3권은 최고회의가 통합, 행사하게 되었다. 최고회의 구성원은 장도영 의장(중장)이 38세로 대부분 30대였다. 박정희 부의장이 44세로 최고령이었다. 장도영 중장이 수반을 겸임한 내각도 평균 39세였다. 외무부 장관인 김홍일(예비역) 중장만이 50대(53세)였다. 장면 정부 출범 때 장관의 평균 나이는 55.8세다. 국가 경영의 핵심 세력이 세대교체됐다. 당시 혁명 장교들 대부분이 미국 유학 경험이 있었다. 51년에서 61년까지 한국군 장교 1만1000명이 미국에 다녀왔다. 군사학교에서 국가 기구의 근대적인 운영과 관리를 배웠다. 당시 정부에는 기획예산제도나 심사분석제도조차 없었다.

 이제 혁명의 기질(氣質)을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 그때 민심은 나라의 거대한 전환을 원했다. 나는 혁명의 불꽃을 국민 속에 점화시키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내가 특별히 중시한 기관이 있다. 최고회의 직속인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국가재건기획위원회, 중앙정보부였다. 나는 중앙정보부장을 맡았기 때문에 최고회의나 내각에 들어가지 않았다.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는 고려대 총장 유진오 박사가 초대 본부장을 맡았다. 유 본부장은 나중에 야당(신민당) 총재를 지낸다. 국민정신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 대다수의 생각은 고루했다.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고,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이걸 고치자는 게 국민운동본부 창설 의도였다. 비가 올 때 물을 쟁여 놨다가 안 오면 터서 쓰려는 마음가짐을 퍼뜨리자는 것이었다. 남 탓을 할 게 아니라 3000만(당시 인구수)분의 1이라도 제 책임을 인정하는 정신을 배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그때 유행하던 재건복을 즐겨 입었다. 그것은 그 운동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재건국민운동 정신은 나중에 새마을운동으로 부활한다.

 국가재건기획위는 경제개발을 계획, 준비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국민들이 먼저 배고픔에서 벗어난 뒤 그 바탕에서 민주주의를 세우자는 구상에 따른 것이다. 재건기획위는 후에 행정부의 경제기획원으로 개편됐다. 경제기획원이 중심이 돼 추진한 수차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최고회의에서 씨앗이 뿌려졌다. 중앙정보부는 내가 직접 창설했다. 국가정보기관의 기본적 임무를 수행함은 물론 새로운 혁명 질서에 장애가 되는 세력들을 치우는 일을 했다. 혁명 과업을 완수하고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문재준(1926~94년)=5·16에 가담했던 육군 6군단 포병단장(대령). 거사일 새벽 포천의 6군단에서 포병단 1300명을 이끌고 육군본부(삼각지) 광장에 진입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육사 5기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과 육군 헌병감을 겸직했다. 장도영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북 출신 육사 5기의 간판으로 JP의 8기 세력과 충돌했다. 출소 뒤 잠시 석유공사 고문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