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8.19
이하경/논설주간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북의 지뢰 도발은 악재였다. 8·15 경축사에 맞춰 준비한 전향적 대북 제안 보따리는 청와대 창고에 처박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유연성을 발휘해 상황을 반전시켰다. “북의 도발에는 단호히 대처해 나가지만 동시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고 평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튼튼한 안보와 평화 구축이라는 투 트랙 노선으로 상대의 적의(敵意)를 단숨에 제압했다. 여론의 분노지수에 굴복하지 않은 용기 있는 발언이었다.
남북의 지도자는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꾸준히 의사를 타진해 왔다. 김정은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망하기 직전 남겼던 ‘생애의 마지막 친필’을 거론했다. 정상회담에 대한 의욕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 지도자와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화답했다. 지난해 10월 4일 인천 아시안게임 때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최용해·김양건 등 북 권력실세 3인방의 깜짝 방남(訪南)도 예사로운 장면은 아니었다. 김정은은 마침내 올해 신년사에서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 데 따라 최고위급 회담을 못할 이유가 없다”며 정상회담을 직접 거론했다. 박 대통령이 지뢰 도발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대화의 여지를 남긴 것은 이런 흐름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정상회담은 남북 모두에 절실하다. 북한은 적대관계인 미국은 물론 혈맹인 중국으로부터도 노골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정상회담은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한 방이 될 수 있다. 북한은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넉 달 만에 미국 클린턴 정부와 적대관계를 끝내자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김정은이 심혈을 기울여온 경제특구 개발에 남한의 투자와 지원도 끌어낼 수 있다. 이를 위해 북한은 무력 시위를 중단하고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박 대통령에게도 남북 정상회담은 축복이 될 것이다. 미국·일본과 중국의 패권다툼에 휘둘리지 않고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전경련이 제안한 남북 경협도 일대 전기를 맞을 것이다. 6·15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인원이 크게 늘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박 대통령이 제안한 명단 교환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남북한은 분단체제의 비용과 고통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지옥 같은 지뢰밭을 만들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사생결단의 대치상황 속에서는 생명과 인권의 가치가 존중받는 정상적인 문명을 누릴 수 없다. 더구나 분단된 한반도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조롱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아베 담화에서 드러나지 않았던가.
이제는 박 대통령이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북한에 보다 분명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 남한과의 경제력 차이가 스무 배나 되고 국제관계에서 고립된 북한은 흡수통일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박 대통령에게는 “북한이 붕괴되면 흡수통일이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내는 사람이 여럿 있다. 하지만 평화와 협력이 없는 통일은 재앙일 뿐이다. 통일 이후 내전을 치른 예멘 사태가 남의 일이 아니다. 평화의 결과로 오는 통일만이 살길이다. 지뢰를 이겨낸 박근혜 대통령이 평화체제를 제대로 준비하기를 기대한다.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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