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7.04.28 이선민 논설위원)
◆허구의 민족주의 | 한스 울리히 벨러 지음 | 이용일 옮김 | 푸른역사 | 220쪽 | 1만2000원
근대세계사의 주역은 민족과 민족국가다. 산업화와 국가간 교섭의 확대가 특징인 근대사에서 민족과 민족국가는 내적인 근대화와
외적인 국가간 경쟁의 주체였다.
그리고 민족이 역사의 기본단위라는 민족주의는 민족과 민족국가를 이끌고 가는 기관차였다.
이는 민족국가가 먼저 태동한 유럽과 북미는 물론 그들의 침략을 받으며 뒤를 따른
중남미·아시아·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민족주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민족간 갈등을 유발할 뿐 아니라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간의 극심한 충돌로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더하다.
지난 50년 유럽연합을 건설하며 초(超)민족국가를 실험해온 유럽에서 민족주의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다. 세계대전들의 도발자였던 독일은 이런 경향이 특히 심하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가 쓴 이 책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저자는 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
민족주의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안된 질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이 무(無)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종족(種族)에 기반한 통치체제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강조한다.
이는 민족을 불변의 실재로 보는 1980년대 이전의 민족주의 연구와 가변적인 것으로 보는 그 이후의 민족주의 연구를
결합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서구문화권의 발명품이다.
근대초기 구미(歐美)가 당면한 정치적 혁명, 종교적 갈등, 위계질서의 동요 등 구조적 위기들에 대한 해법으로
민족주의가 등장했다.
민족과 민족국가를 통해 통치질서를 재확립하고 대중을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킨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이런 움직임은 영국·미국·프랑스에서 모범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 세 나라의 근대화는 19세기 중반 이후 다른 나라들의 모방을 가져왔다.
이렇게 시작된 민족주의는 네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영국·미국·프랑스의 ‘통합민족주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민족주의’, 동유럽·러시아·오스만제국의 ‘분리민족주의’,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의 ‘전이(轉移)민족주의’가 그것이다.
뒤의 세가지는 상대적인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적 근대화의 이념이었다.
이런 고통스런 근대화의 경험은 민족주의의 극단화를 낳았다.
민족과 민족국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내·외부의 적(敵)과 이방인에 대한 적대를 가져왔다.
더구나 민족주의에 내재한 소명의식과 형제애는 타자(他者)를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때로 ‘원수’에 대한 폭력의 행사를 정당화했다.
독일근대사에 대한 분석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독일에서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1790년대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프로이센의 팽창 정책으로 독일 민족국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독일 민족주의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 “프랑스를 때려 죽여라”는 선동이 지식인의 입에서 나올 정도였다.
1차 대전의 패배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 결과는 히틀러라는 극단적 민족주의자의 집권이었다.
2차 대전 패전 후 독일이 민족주의의 주술로부터 풀려나서야 독일의 번영은 찾아왔다.
저자는 근대세계의 성공, 즉 경제성장·입헌-법치국가·사회복지 등을 민족국가와 연결시키는 분석을 거부한다.
그것은 우연에 불과하며, 민족국가에 부당한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내부적으로 평화로운 시민공동체와 외부적으로 민족국가들끼리 협력하는 평화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따라서 이제는 민족주의 개념을 걷어내고 대신 헌법국가, 법치국가, 사회복지국가라는 보편적인 토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비(非)서구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별로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 민족주의의 토대가 되는 종족적 전통이 없었다.
이 때문에 정치지배 시스템이 불안정하게 됐고, 그 결과 개발도상국은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안정된 민족국가는 서양에만 존재한다”는 주장에서 비서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한국은 종족적 전통에서 출발한 민족주의를 토대로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했다.
그러면서도 독일과 같은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이제 중국과 인도 등 다른 비서구 국가들도 한국이 걸은 길을 뒤따르고 있다.
이들의 역사적 경험까지 포괄하는 더 폭넓은 민족주의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제 Nationalismus.
[각주 - 민족, 민족주의]
민족(民族) 1. 일반적으로는, 동일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 풍습,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을 갖는 인간집단이다. 2.[명사]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인종이나 국가 단위인 국민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유의어] 겨레, 동족
민족-주의(民族主義)
<정치>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가장 중시하는 사상. 19세기 이래 근대 국가 형성의 기본 원리가 되었으며, 분열되어 있는 민족의 정치적 통일을 목표로 하는 형태와 외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나 독립을 목표로 하는 형태로 크게 나누어진다. [비슷한 말] 내셔널리즘ㆍ민족 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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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책 중에서 시기적으로 앞서고 널리 알려진 것은 프랑스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가’(책세상, 신행선 옮김)이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한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1882년 ‘이성(理性)의 사도(使徒)’ 르낭이 소르본 대학에서 강 연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은 민족을 종족적·언어적 실체가 아니라 주관적 귀속의식을 토대로 한 정치적 실재로 파악했다. “민족의 존재는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라는 유명한 구절은 이 주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백낙청 엮음 (1981년 07월 15일) 페이지수 : 340 / 판형 : 신국판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창비, 백낙청 엮음)는 민족주의에 대한 세계 학계의 학문 연구 중 주요 성과들을 한데 담았다. 한스 콘, E H 카 등 민족주의 연구의 선구자로부터 어네스트 겔너, 앤터니 스미스, 톰 네언 등 현재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연구자, 그리고 제3세계의 민족주의론까지 망라하고 있다.
민족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단행본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창비, 강명세 옮김)와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나남출판, 윤형숙 옮김)다. 홉스봄은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프랑스대혁명에 의해 처음 등장한 민족주의를 발전단계에 따라 태동기(1780~1870), 발전기(1870~1918), 극성기(1918~1950), 쇠퇴기(1950~)의 네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앤더슨의 책은 민족을 왕조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조형물로 본다. 그는 민족주의가 중남미의 지배층이었던 크리올(유럽 이민자의 후예)에서 기원하여 유럽과 다른 지역으로 전파됐다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