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5.08.28 강천석 논설고문)
南北, 상대 인정했으면 國號부터 바로 불러 줘야
대한민국 法統 계승한 上海 임시정부 후원자는 蔣介石 정부
군사 대결로 미끄러져가던 한반도 상황이 일변(一變)했다.
대포에 포탄을 재던 손으로 대화 품목을 챙기기 시작했다.
'남북 고위 당국자 접촉 공동보도문' 한 장이 만든 변화다.
남쪽에선 각종 제안이 봇물 터지듯 넘치고 하룻밤 자고 나면 기대가 몇 뼘씩 자라고 있다.
청와대가 '남북문제에 과속(過速) 말라'고 고삐를 좨야 할 정도다.
북쪽에선 며칠 행적이 묘연(杳然)하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내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 평화를 귀중히 여기는 숭고한 이념의 승리"라고 이번 남북 접촉의 성과를 자평(自評)했다. 언제 먹구름이 몰려 왔는지 모를 만큼 파란 하늘이다.
공동 보도문을 보면 이런 기적을 만들어낸 주체(主體)는 '남과 북'이다.
이름도 없이 그저 방위(方位)만 표시돼 있다.
어디의 남쪽이고 어디의 북쪽인지 미루어 짐작하란 뜻인 모양이다.
개인 사이의 권리와 의무 한계를 규정하는 계약서도 이렇게 부실(不實)하지는 않다.
공동 보도문은 사태를 수습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양측이 공동으로 혹은 독자적으로 취할 행동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다. 이 중대한 약속을 주고받은 당사자가 이름도 주소도 없는 '남과 북'이다.
기대 뒤편에서 불안이 고개를 든다.
정상(正常) 관계의 출발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상(正常) 관계의 출발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 사이나 국가 사이나 이 이치는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했으면 상대의 이름을 바로 불러줘야 한다.
현재의 남북 관계는 이 기본이 왔다갔다한다. 기본이 흔들리면 속도는 의미가 없다.
남북 관계에서 빠르게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는 더디지만 쉼 없이 전진하는 달팽이만 못하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이 갈라진 이후 남북 관계를 뒤흔든 최초의 대지진처럼 느껴졌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이 갈라진 이후 남북 관계를 뒤흔든 최초의 대지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자주(自主)·평화·민족적 대단결'이란 어마어마한 구호(口號)를 생산한 이 성명문에는
'대한민국'이란 우리 이름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저들 이름도 없었다.
'서울'과 '평양'이라는 지명(地名)만 나와 있다.
서로를 '꼭두각시'라는 뜻이 담긴 '괴뢰(傀儡)'로 부르는 정치 상황에서 내놓은 합의의 끝은 허망했다.
남북이 서로의 이름을 바로 불러준 것은 노태우 정부 들어서 처음이다. 1991년 12월 남북 고위급회담에서다.
남북이 서로의 이름을 바로 불러준 것은 노태우 정부 들어서 처음이다. 1991년 12월 남북 고위급회담에서다.
남북 총리가 대표로 나서 만든 남북 기본합의서에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이 함께 서명했다. 한반도 비핵화(非核化) 합의도 뒤따랐다.
물론 이 합의들은 지켜지지 않았다.
북한은 합의서 뒤에서 핵(核)개발에 열중했고 결국 다음 정권에서 한반도 핵 위기로 번져갔다.
그 후로도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남북 대화 40년이 남긴 교훈은 합의의 규모가 크고 대담할수록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북 대화 40년이 남긴 교훈은 합의의 규모가 크고 대담할수록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합의가 지켜질 현실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각본(脚本)만 혼자 앞서 나가는 드라마의 파탄은 시간문제다.
기대가 부풀 때 벽돌 한 장을 똑바로 쌓는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벽돌 한 장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의 이름을 바로 불러 주는 것이다.
남과 북은 1991년 UN 동시 가입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렇다면 상대의 국호(國號)부터 바로 불러야 한다.
이름이 무슨 대수냐고 할지 모르지만 2000년 전 동란(動亂)의 시대를 살았던 경세가(經世家)는
이름이 무슨 대수냐고 할지 모르지만 2000년 전 동란(動亂)의 시대를 살았던 경세가(經世家)는
'당신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떠하겠는가'라는 물음에 "무엇보다 먼저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대답했다.
'대화'와 '협력'이라면 그 이름에 걸맞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이 따로 헛바퀴를 돌려서는 안 된다.
그래야 그 위에 다음 벽돌을 올릴 수 있다. 군사 대결로 치닫는 듯하던 상황에 급제동(急制動)을 건
'고위 당국자 접촉 공동 보도문'의 브레이크 역할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도 남북 간 약속의 실천 주체가 명기(明記)되지 않은 데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의 편치 않은 심기(心氣)가 훤히 내다보이는데도 중국 전승(戰勝)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도 남북 관계 때문이다. 남북 관계가 안정 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의 입김에
더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다.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한반도의 그런 현실을 더 실감(實感)하게 만들었다.
사실 대한민국이 그 법통(法統)을 계승하는 상해 임시정부의 중국 쪽 후원자는 연안(延安)의 모택동(毛澤東) 세력이 아니라
장개석(蔣介石) 정부였다. 1943년 미국·영국·중국의 카이로 선언에 '조선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조선을 자유 독립국가로
만들겠다'는 특별 조항이 들어가도록 배려한 것도 장개석 정부였다.
지금의 중국은 남북 분단 고착화(固着化)의 원인 제공자의 하나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은 이런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중국을 방문한다.
중국은 남북 관계 개선에 더 열의(熱意)를 보여야 하고 미국의 한반도 현재 정세에 대한 심려(深慮) 또한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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