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9.19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함께 숙직하는 동료에게 가을 깊어가는 북부의 관청은 시 짓기에 그만인데 백악과 숲까지 저녁 빛깔이 아주 곱다. 이 동네를 독차지했어도 제 앞가림 전혀 못하고 관아 문이나 지키면서 작은 자리 그냥 얹혀사네. 날씨가 더 서늘해져 대추 볼은 발갛게 물들었고 가랑비 내린 뒤라 배춧속은 파란빛을 띠네. 새벽 지나 파루종 칠 때라고 그대여 비웃지 말게나. 물이 흐르면 물도랑 이루는 섭리를 왜 그리 의심하는가? | 宰監直中奉和何求翁 岳色林光晩景奇(악색임광만경기)
抱關聊復借鹪枝(포관료부차초지)
綠入蔬心細雨時(녹입소심세우시)
渠成水到更何疑(거성수도갱하의) |
조선 후기 역사가 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1731∼1797)가 1796년 사재감(司宰監)에 근무할 때 지었다.
밤새 동료와 숙직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시를 써서 보여주었다.
가을이 깊어가 백악산 빛 멋지고 단풍 고와서 시가 절로 나온다.
그렇지만 자신은 먹고 살 것도 마련해놓지 못한 채 언제 밀려날지 모를 자리를 위태롭게 지키고 있다.
요사이 발갛게 익은 대추와 파랗게 속이 찬 배춧잎을 보면서 나는 그만도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동료가 "우린 파루종처럼 끝물이야"라며 속내를 풀어놓는다.
그래도 나는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
물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물도랑이 만들어지듯이 평생 노력한 보람이 때가 되면 이루어지겠지.
그렇게 숙직하는 밤이 깊어간다.
각주 - 사재감(司宰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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