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함께 걷는 길] ④ 시인 최영욱의 하동 '토지길'
"1969년부터 1994년까지 '토지'를 쓰시는 동안 박경리 선생께선 한 번도 하동에 내려오신 적이 없어요. 다른 작가들 같으면 집필 기간에 몇 번을 와서 둘러보고 갔을 텐데 한 번을 안 오셨지.
굳이 볼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머릿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들어 있어서…."
평사리문학관 관장이자 시인인 최영욱(57·사진)씨가 말을 마치고 잠시 얕은 한숨을 쉰다.
최 관장의 말에 따르면 하동은 문학에 빚을 진 고장이다.
박경리(1926~2008년) 선생이 25년간 200자 원고지 4만장에 이르는 분량으로 완성해낸 대하소설
'토지'. 그 소설 속 중요한 공간 하나가 바로 하동 평사리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평사리의 대지주 최치수와 별당 아씨, 최씨 집안의 마지막 핏줄 최서희와
그 서희를 지키는 김길상의 팽팽한 서사가, 그 굴곡진 역사와 한숨의 이야기가 쓰였다.
하동에서 나고 자란 최영욱 관장은 "'토지'를 읽고 한달음에 박경리 선생을 찾아가서 일단 큰절부터 했다"고
박경리 선생과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 '토지'의 전율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진 않았다.
하동군청·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등과 손을 잡고 소설 속 공간을 그대로 재현한 '최참판댁' 세트를 완성하는 데
힘을 쏟았고, '평사리문학관'을 짓고, 토지 속 공간을 직접 걷고 체험할 수 있는 '토지길'을 조성했다.
'토지문학제'도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박경리 선생의 허락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았다.
7번이나 찾아가 조른 끝에 겨우 승낙을 받았다.
최 관장은 "최참판댁이 완공되고 기쁜 마음으로 박경리 선생을 초대했다.
선생은 차에 내려 나를 보자마자 내 손을 잡고 정작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큰 산에게 미안해서 어쩌느냐.'
나중에야 알았다.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하동의 대자연이 혹여나 훼손될까 봐 걱정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걸.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평생 산천(山川)을 아끼고 염치를 생각하며 사신 분이었다."
- 하동 악양면의 조씨고가가 내려다 보이는 '토지길' / 유창우 영상미디어 기자
'토지길'은 섬진강 물길을 따라간다. 소설 '토지'의 실제 공간이었던 평사리를 걷는 것이 1코스(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