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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46] 상투적 표현 가득 '국군 위문편지'.. 초등생들 '명복을 빕니다' 쓰기도

바람아님 2015. 11. 18. 04:35

조선일보 2015-11-18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 현장의 한국군 앞으로 도착한 고국의 선물 꾸러미에선 가끔 김치 포장이 터져 엉망이 됐다. 김치 냄새에 익숙지 못한 미군들이 마스크를 쓰고 법석을 떨면서도 시뻘건 국물로 범벅 된 상자 안에서 꼭 골라냈던 귀한 '서류'가 있었다. 위문편지였다. 파월 용사 대부분은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매일 오후 4시쯤을 가장 즐거운 시간으로 꼽았다. 제법 숙녀티가 나는 여고생의 예쁜 글씨에 가슴 설레기도 했다(조선일보 1966년 2월 17일자).

학생들의 '국군 아저씨 위문편지'는 1950년대에 시작됐다. 편지가 인연이 되어 병사와 여학생이 결혼까지 하는 일은 6·25 때부터 있었다. 1960년대엔 찬 바람이 불면 교육청별로 편지 숫자를 할당했고,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썼다. 누군지도 모르는 장병을 대상으로 무조건 쓰라고 하니 제대로 된 편지가 될 리 없었다. 거의 모든 위문편지는 "전방에 계신 국군 아저씨, 추운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로 시작했다. 1965년 어느 장교는 위문편지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표현 세 가지로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라서 아저씨 뒤를 따르렵니다' '남북통일 합시다' 등을 꼽았다. 어떤 병사는 '군인 아저씨, 명복을 빕니다'라고 끝맺은 초등생의 편지나 '손 시리면 장갑 끼고, 목마르면 물 드세요'라는 어이없는 표현을 쓴 편지에 서운함을 느꼈다고 했다.


학교별로 1000통 안팎씩 쓴 위문편지는 치약·비누 등 위문품과 나란히 부대에 배급됐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후엔 위문편지가 '월남 장병 아저씨' 쪽으로만 몰렸다. 이 무렵 동부 전선의 한 사병은 병영 취재를 나온 기자에게 "파월 장병에게 편지 쓰고 남은 시간에 우리한테도 좀 편지를 써 주면 추위가 덜할 것 같다"고 말했다. 1971년 베트남에서 연대장으로 근무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위문편지를 한 통 받았다. 베트남에 와서도 늘 육 여사에게 안부 편지 보내며 공들인 끝에 받은 답장이었다. '전두환 대령'은 퍼스트레이디의 편지를 복사해 소속 사단장과 주월 한국군 사령관에게 보내며 '능력'을 과시했다(경향신문 1996년 12월 9일자). 의무적으로 쓰게 했던 국군 위문편지는 1988년 문교 당국 지시에 따라 30여년 만에 중단됐다. 병사들의 통신과 면회 기회가 늘면서 '편지' 역할 자체가 점차 사라져 갔다. 끙끙대며 숙제하듯 쓴 것인 줄 알면서도 반가웠던 위문편지의 기억은 아날로그 시대의 전설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