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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그래 나는 졸부다… 문화에 눈뜬"

바람아님 2015. 12. 1. 10:00

(출처-조선일보 2015.12.01 김태익 논설위원)


김태익 논설위원작년 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중국 명나라 때 찻잔 하나가 380억원에 팔렸다. 
낙찰자는 상하이의 거부 류이첸(劉益謙·52). 일은 그가 찻잔을 인수한 직후 벌어졌다. 
그 귀한 잔에 푸얼차(普洱茶)를 따라 단숨에 마신 것이다. 
그에게 '개념 없는 사람' '돈 많은 바보'란 비난이 쏟아졌다.

류이첸이 항변했다. 
"골동이란 게 본래 곁에 두고 즐기는 것 아닌가. 
진품(珍品)을 손에 넣고 기쁜 마음에 차 한잔 따라 마신 게 무슨 잘못인가." 그러곤 외쳤다. 
"그래, 나는 투하오(土豪·졸부)다."

며칠 전 이 졸부가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딜리아니 그림 '누워 있는 나부(裸婦)'를 1억7040만달러(약 1972억원)에 사들인 것이다. 
신용카드로 그림 값을 결제하면 그 포인트만으로 런던~뉴욕을 비행기로 2000번 왕복할 수 있다는 
부러움 섞인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 류이첸이 한 말들은 전과 달랐다.

"세계적 미술관들이 모딜리아니 누드화를 갖고 있다. 
중국인들은 앞으로 외국 나가지 않고도 이런 일급 미술품을 국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중국도 먹고살 만큼 됐으니 이제 문화적으로 세련돼야 한다"고 했다.

요즘 중국은 자고 나면 미술관 하나가 생긴다 할 정도로 미술관 설립이 붐을 이루고 있다. 
그걸 주도하고 있는 게 류이첸 같은 신흥 부자들이다. 
류이첸은 중학 2학년을 중퇴하고 가방 장사와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잇다가 주식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상하이에 두 개의 미술관을 세웠다.

돈 있는 사람이 부(富)를 과시하거나 새로운 투자처를 찾으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미술이나 문화를 과시와 투자의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물을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나누려 
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 세계 경매 시장의 큰손은 단연 중국 부자들이었다. 
그들의 활약에 힘입어 피카소, 고흐,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의 일급 미술품들이 속속 중국의 품에 안기고 있다. 
이른바 유상(儒商), 인문적 교양과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부자들의 출현이 정부의 지원과 맞물리면서 
중국 문화·예술의 놀라운 역동성을 낳고 있다.

1990년 버블 경제가 한창일 때 고흐의 '가셰 박사 초상'을 8250만달러에 샀다가 죽으면서 이 그림을 무덤에 함께 넣어 
달라고 한 일본 부자가 있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부자들은 예술을 진정 사랑해 서양 거장들의 명작을 샀고 
이를 나누기 위해 미술관을 지었다. 타이어·화장품·석유·잉크·제약·기계·전자·보험… 수많은 기업인이 세운 미술관 중엔 
유럽·미국의 웬만한 미술관보다 서양 미술품 컬렉션이 뛰어난 곳이 수두룩하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아직 1만달러가 안 된다. 
우리는 국민소득 1만, 2만달러를 거쳐 3만달러를 향하는 동안 세계에 내놓을 만한 미술품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꼽기가 망설여진다. 미술품 구입에 비자금, 불법 대출 같은 향기롭지 못한 말들이 따라  다니다 보니 
부자가 그림을 사는 걸 보는 사회의 시선도 곱지 않다.

졸부가 문화에 눈을 뜨면 국민이 행복해진다. 예술의 공익성을 생각하는 졸부는 더 이상 졸부가 아니다. 
정부나 사회도 문화에 눈뜬 부자는 또 다른 애국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박수를 보내야 한다. 
어느새 정신적으로도 훌쩍 큰 것 같은 중국을 보며 우리 문화가 서 있는 자리를 자꾸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