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열린 포럼] '개인'을 주목하는 마을 운동

바람아님 2015. 12. 10. 19:42

(출처-조선일보 2015.12.10 이흥우 철학박사·(사)해반문화사랑회 명예이사장)


이흥우 철학박사·(사)해반문화사랑회 명예이사장 사진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에서는 해마다 가을·겨울맞이 마을 축제가 열린다. 

연수구의 보호수 느티나무 앞에서 아주머니들이 국수와 떡을 준비하고, 

노인들은 올해 533회 생일을 맞은 이 나무 앞에서 지난 10월 17일 막걸리로 예를 올렸다. 

이날 마을공동체학교 풍물패 아이들은 골목을 돌며 꽹과리·북·장구로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동네 주민인 강민구·김석태 부부의 은혼식을 알리는 청사초롱이 내걸렸고, 어린이를 비롯해 축제 

비용으로 1000~2000원씩 낸 주민 1246명의 이름을 적은 마을 신문도 돌렸다.

'청학동 마을공동체'는 1998년 토지구획정리사업과 관련해 결성된 주민대책위에서 시작됐다. 

구획정리사업에서 확보한 자투리땅에 2001년 주민 700여명이 돈을 모아 공부방인 '나눔의 교실'을 세웠고, 

방과후 교실인 '청학동 마을공동체 학교'가 여기서 문을 열었다.

청학동 축제에 앞서 9월 26일에는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 로데오거리에서 동네 예술제인 '마스터축제'가 열렸다. 

이 동네에서 미군을 상대로 군복 수선집을 운영해온 이기선 할머니가 예술가들과 함께 만든 가방이랑 파우치를 기념품으로 

내놨다. 미군의 체육복이나 유니폼에 실크스크린 작업을 해온 강규호씨도 기념 티셔츠를 제작해 선보였다.

안정리는 농사를 짓던 땅이다. 

1942년 일본 해군비행장이 건설되고, 1952년에는 K6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많은 이주민이 모여들어 한동안 북적댔지만 

전성기는 20여년 전에 끝났다. 그곳에 평택시와 경기문화재단이 새롭게 마을 재생사업을 벌이고 있다. 

'마스터축제'는 이 중 문화예술을 활용한 마을 재생사업의 하나이다. 

'소문난사진관' 사장님, '명문부동산' 사장님, 영어 문화해설사 이상열씨, 영시(英詩)를 쓰는 박종만씨 등 마을 사람들의 

사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 등이 앞으로 이곳 팽성예술창작공간(아트캠프) 2층 생활사박물관에 상설 전시될 예정이다.

일반 주민과 상인·미군 가족으로 구성된 주민자치기구가 이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평택시와 기획자는 조연이고, 마을 주민 하나하나가 주인공이다.

시대에 따라 독립운동, 새마을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환경운동, 주민자치운동 등이 펼쳐져 왔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대의명분이나 거대담론에 묻혀 운동의 최종 목적인 참여자들의 얼굴이 잊히곤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운동이든 말초혈관과 같은 주민에까지 그 기운이 다다라야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정책들 가지고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체를 가릴 수도,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는 시대가 됐다. 

사실 모든 국가 정책과 시민사회운동의 최종 목표는 존엄한 '개인들'의 행복한 하루하루가 아닌가.

청학동과 안정리의 마을 잔치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우크라이나 저널리스트 알렉시예비치의 문학 세계와도 

일맥상통한다. 알렉시예비치는 수많은 사람의 육성을 담은 논픽션으로 '목소리 소설'이라는 새 문학 장르를 열었다. 

그가 인터뷰해 기록한 수백 명의 목소리가 훗날 노벨상을 받는 밑거름이 됐다. 

청학동과 안정리 주민들의 목소리가 그의 소설 속 목소리처럼 빛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게 지방 시대다.